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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박? 자신을 내어주셨다 (요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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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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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다락방 강화’(13-16장)를 통해 독립준비가 되지 않은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세운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기도(17장)까지 끝내고 드디어 고난의 현장으로 가기 위해 기드론의 깊은 골짜기(Kidron, 건천)를 건너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으로 가신다. 요한복음서에서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 기슭의 이 겟세마네 동산을 그냥 ‘동산’(olive grove)이라 표현했다.

자주 가시던 곳이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무드가 다르다. 대적하는 사람들이 끝장내겠다고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잘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여러 번 예고하셨던 바로 그 일이 터질 순간이지만 예수님은 그 운명(destiny)의 시간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발적인 발걸음으로 대적들과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다. 배신자 유다가 예수님이 여기 계실 것으로 알았던 것(2절)을 보면 숨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시다.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달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중에 겪으셨던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민에 대하여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당당하게 명령하신 인간 이상의 강한 존재임을 부각시켰다. 요한이 그린 그림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주도권을 잡고 계셨던 것과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었음을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 날의 대적들은 일단 세 부류로 볼 수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여 폭력으로 식민통치를 하던 로마 군인들과 믿음 없는 의식과 율법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라는 책망을 들었던 소경 같은 바리새인들과 평소와 달리 그들과 손잡은 대제사장들, 그리고 사도로 선택받고, 주님의 지근거리에서 수많은 말씀과 이적을 체험하고도 욕망에 눈이 먼 배신자 가룟 유다가 그들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고약한 대적자들이 기다리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주저 없이 나아가신 것은 로마의 폭력적인 권력에 대한 승리였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믿음에 대한 승리였으며 배신자 가룟 유다의 욕망에 대한 위대한 승리였다.

예상대로 대적자들이 몰려왔다. 배신자 유다가 앞장서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손에 든 군대(안토니아성 수비병)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아랫사람들이 뒤따른다. 등과 횃불은 만월(滿月)인데도 어둠을 이용하여 도망칠 것에 대한 대비이고, 무장은 저항을 예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숨거나 저항은커녕 명령하듯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다. 그 당당하신 기세에 대적자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나사렛 예수”라는 대답을 듣고 “내가 그라”(신성을 주장한 형식)는 답변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다”(6절)고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분위기에 완전 압도당한 듯하다. 떼를 지어 몰려오고도 겁에 질린 경외심(敬畏心)을 표한 꼴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왕관을 피하셨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 고난의 잔을 향해서는 너무 담대하시다. 영광의 자리는 사양하셨어도 십자가의 고난은 자원하여 취하시고, 세상의 인기와 명예는 극도로 경계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의 과업 완수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대적들에게 내어주며 사지(死地)로 잡혀가면서도 제자들의 안위는 끝까지 챙기셨다(8절). 훗날 복음을 위해 순교의 십자가를 지게 될 제자들이지만 아직은 보호의 대상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라’(아페테)는 동사는 부정과거 명령형, 부탁이 아니라 권위에 찬 명령이다.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무력행동(10절) 속에서도 오직 양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선한 목자의 숭고한 모습으로 체포당하기보다는 자신을 내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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