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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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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양용근이 태어나서 순교하기까지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하에 놓인 암울한 시기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한 해에 태어났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서울에는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외교권뿐만 아니라 모든 내정에 일제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이후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체결로 인해서 형식적인 대한제국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36년간을 일제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틈에서 대한제국의 망국의 운명을 면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제 1기는 무단통치기로 조선을 강제 합방한 1910년에서부터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까지이고, 제 2기는 문화통치기로 3.1운동 이후 만주사변까지이며, 제 3기는 전쟁침략기로 만주사변부터 해방까지이다.

1. 무단 통치기, 1910~1919년

1910년은 한일합병이 시작된 해다. 이 시기는 이미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상당한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당시 조선에는 20만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 이상의 재학생이 있었고, 그리고 1,900여개의 교회(집회소)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다. 지도자로서 외국인 선교사 270여 명,조선인 교직자 2천 3백여 명이 있었고, 그밖에 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가진 강대한 조직이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다. 기독교회는 구미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무엇인가 강력하고도 적절한 조치를 통감하였다.

그 결과가 기독교 탄압이었다. 특히 일제는 이미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를 견제하여 모든 종교들을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일제는 명목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겠지만 치안유치 곧 총독부에 의한 일제의 조선 통치라는 기본적인 목적을 벗어나지 않을 경우 그리고 종교가 집단적이지 않은 경우에만 자유를 인정하겠음을 밝혔다. 종교는 평안한 마음과 개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총독부의 주장은 훗날 집단적이고 국가적인 신사참배 강요라는 문제 안에서 판단한다면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2. 문화 통치기, 1920~1930년

3.1운동을 통하여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방적인 방법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가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유화정책으로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유화정책, 회유정책, 문화통치 등의 시기로 부른다. 이 시기에 일제는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고, 기독교 학교를 통제할 목적으로 학교에서 성경공부나 예배를 금했던 것을 성경공부도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성경공부나 예배금지로 폐교를 했던 학교들이 다시 학교 문을 열게 함으로 무력이 아니라 유화적인 정책을 전개했다. 하지만 문화 통치라고 해서 기본적인 총독부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일제는 외관상 변화를 꾀하였으나 그 속에 있는 정책들을 유지하면서 친일파로 만들기 위한 회유정책으로 기만적인 정책이었을 뿐이다.

3. 침략 전쟁기(병참 기지화 정책기), 1931~1945년

일제는 1931년 9월에 만주침략을 도발하면서 일본 전역과 일제의 식민지에 대하여 정신교화운동(精神敎化運動)을 강화하고 종교 탄압을 강화하게 되었다.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하였으며 ‘내선융화’ 즉 일본인과 조선인이 융합일치를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동등한 위치에 선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일본화 하겠다는 뜻이며 조선인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을 전쟁수행에 이용하기 위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전개하게 된다. 심전개발운동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충성심을 고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종교를 이용해서 종교인을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경신숭조(敬神崇祖)사상 즉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조상 제사의 관습을 이용해서 일제의 신사를 세우고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조상 숭배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일본천황을 최고 도덕자로 존경하고 현인신으로 섬기게 함으로 충성스런 일본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국 기독교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에 대한 ‘불충 죄’를 적용시켜 처벌하기에 이른다.

 

양용근은 이런 국가적 비극이 시작된 무단통치기에 피압박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문화 통치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침략 전쟁기에 적국인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며 대학을 다녔고 귀국해서 신학교를 졸업 해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목회활동을 했다. 그의 가슴에는 언제나 부당하게 대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심보다는 신앙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하게 불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를 공부하게 하고 그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소망을 가지게 한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환난 중에 참으며’(롬 12:12), 이기고 또 이기려고(계 6:2)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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