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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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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양용근이 살았던 시대는 두 개의 큰 외부 세력이 나라를 이끌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였다. 그들은 조선을 일본화 하여 식민지로 지배하고자 하였고 또 하나는 기독교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 학교를 세워서 조선인 지도자를 배출하여 발전된 조선의 나라가 되게 하려고 했다.

양용근이 태어난 1905년은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시작하는 해였지만 그와 함께 선교사들도 조선의 선교를 위해서 뜻있는 일을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 해년 5월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의 남장로회와 북장로회, 캐나다 장로회와 호주 장로회 등의 네 장로회와 그리고 미국 남북 감리회가 연합하여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The General Council of All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구성했다. 협의회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서로 협력하여 한국에 하나의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본 협의회는 먼저 각 지방을 분할하여 선교 하는 예양협정(禮讓協定, Comity Agreement)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서 미국 북장로교회는 서울, 경상북도, 황해도, 평안도 지방을 맡아서 선교하기로 했고, 캐나다 장로교회는 함경도 지방을 맡아서 선교하기로 했다. 호주장로교회는 경상도 지방을 맡았고, 북감리교회는 강원도 원주지방과 충청도, 황해도 일부, 평양지방을 맡았다. 남감리교회는 강원도 지방을 그리고 남장로교회가 전라도 지방을 각각 맡아서 선교하기로 합의 했다.

양용근의 신앙입문은 그가 다닌 순천 매산학교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맏형인 양용이(梁用伊, 1895. 10. 23.~1942. 4. 26)가 이 학교를 먼저 다니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이후 동생인 양용근을 이 학교 입학을 독려하면서 신앙의 길로 인도했다. 순천의 매산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호남지방을 맡아 선교하면서 세운 학교이다. 양용근의 신앙이 매산학교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남장로교의 신학과 순천선교가 양용근의 순교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미국 남장로교의 신학

미국 남장로교는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소재한 유니온 신학교(the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를 중심으로 한 교단이다. 그들의 교리적 기초는 철저한 칼빈주의(Calvinism) 신학이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 섭리 등 칼빈주의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는 보수주의 신학이었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싸우며 바른 신앙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미국의 해외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발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이다. 이 SVM을 통해서 모집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선교를 했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신학적으로는 보수주의였고 개인구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사상이 바로 남장로교회의 사상이었고 남장로교를 대표하는 레이놀즈(Rev. William D. Reynolds: 이눌서, 1867~1951) 선교사의 사상이었다. 특별히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중산층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복음주의의 바른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신앙도 각각이었다. 그런 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특히 선교사 레이놀즈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호남지방의 선교를 담당하면서 이 지역을 비롯해서 한국 교회에 바른 신앙의 기초를 놓는 일에 큰 공헌을 했다.

 

2.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순천지방 선교

순천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894년 미국남장로회 소속 레이놀즈 선교사에 의해서이다. 순천지방에서의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는 호남지방의 다른 도시인 전주나 군산이나 목포나 광주보다 비교적 늦게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순천에 선교기지를 세우기 이전에 현지인들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세웠다. 1905년에 세워진 여수의 장천교회, 보성의 무만동교회와 광양의 신황교회 등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가 만주나 다른 외지에 나가서 복음을 믿고 세운 교회들이다. 이렇게 이미 스스로 세워진 교회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활동을 함으로 교회들이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

1911년에는 순천에 선교기지를 건설할 계획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계획서에는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이 주 사업으로 되어 있었다. 선교기지에는 종교시설, 교육시설, 의료시설 주거시설 등의 구역으로 편성하고 거기에 따른 각종 시설들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 계획에 의해서 다음해 1912년에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순천에서 일할 선교사들을 파송함으로 본격적인 순천선교 시대를 열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순천지방 선교를 함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시설 의료시설 등을 세웠으며 특별히 매산학교의 설립은 양용근의 신앙형성과 성장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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