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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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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순천은 전남 동부지역의 중심도시이며 전라도지역을 선교지로 할당받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전남 동부지역의 선교중심지로 적합한 도시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순천에 선교기지를 세우고 선교를 하면서 중요하게 여기고 시작한 사업이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는 일과 병원을 세워서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었다. 순천에 배정된 의료 선교사인 의사 팀몬스(Herny Loyale. M. D. Timmons, 1878~1975)와 미혼여성이었던 그리어(Anna Lou R. N. Greer, 1883~1973) 양을 중심으로 의료선교가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판잣집에서 시작해서 1915년에는 35개의 침대와 한국 최고의 의료시설을 갖춘 알렉산더 병원이 개원되었다. ‘애양원’이라고 알려진 여수 신풍리에 세워진 비더울프 나병원도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세운 병원이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의료선교와 더불어 역점을 둔 교육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 바로 ‘매산학교’다. 매산학교는 현재 매산중학교와 매산고등학교 그리고 매산 여자고등학교 등의 세 학교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사숙(私塾)시기(1910년 4월~1913년 8월)

매산학교는 2010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매산100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매산백년사(梅山百年史)』를 발간하면서 학교의 연혁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학교 설립 일에 대한 여러 견해가 나뉘어진 것을 취합해서 매산학교를 사숙 시기, 은성학교 시기, 매산학교 시기, 그리고 해방 후의 매산중학교 시기 등으로 나누어서 매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순천지역에 선교기지를 개설하기로 계획하고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매산학교는 시작이 되었다. 선교사인 변요한(John F. Preston), 고라복(Robert Coit) 목사에 의해서 1910년 4월 금곡동 향교 근처의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30명 정도의 학생들에게 성경과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비록 이름 없는 학교였지만 순천에서는 처음 생긴 학교였다. 이 시기는 매산학교가 정식을 인가를 받거나 학교의 형식을 갖추지는 못했기에 사사(私私)로이 학문을 가르쳤기에 사숙의 시기로 규정하지만 교육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매산학교 시작이라고 본다.

사숙시기는 비인가의 사사로운 학교였지만 양용근의 가문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양용근의 맏형인 양용이가 이 시기에 선교사들에게 공부를 하면서 신앙을 받아들였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고향에 교회와 학당을 세웠기 때문이다.

 

2. 은성학교 시기(1913년 9월~1916년 6월)

정식학교로 인가받아 출범한 학교명은 ‘은성’ 학교였다. 은성학교는 3년여 기간 동안 운영되었으나 일제가 개정한 사립학교 규칙과 사립학교를 관공립(官公立)학교로 전환할 것을 강요함에 따라 선교사들은 자진 폐교 결정을 내렸다. 왜냐하면 일제에 의한 사립학교 규칙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에서는 성경공부와 모든 종교적 행위를 금지시켰다.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이유가 없음을 뜻했다. 결국 은성학교의 시기는 일제의 강압적인 조치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3. 매산학교 시기(1921년 4월~1937년 9월)

기독교 교육 금지로 폐교되었던 은성학교는 일제가 지금까지 펼친 무단통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를 표방함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성경을 가르치며 학교를 운영해도 된다는 당국의 유화정책으로 1921년 4월 ‘매산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를 함으로 이 시기를 매산학교 시기라 한다. 양용근은 이 시기에 매산학교에 입학을 하여 신앙을 배웠고 매산학교가 졸업을 한다고 해도 바로 대학에 입학할 수 없는 학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중퇴를 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 매산학교도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서 다시 폐교를 결정하고, 해방 이후 매산중학교로 재차 개교할 때까지 폐교상태로 남게 되었다. 매산학교의 폐교는 미국 남장로교가 세운 광주의 숭일남중학교, 수피아여중학교, 목포의 영흥남중학교가 강제 폐교되자 매산학교는 강제 폐교가 되기 전에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매산학교는 철저하게 성경을 가르치며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앙 문제에 있어서 ‘신사참배’를 종교적 의식으로 확고하게 거부하는 의미에서 자신 폐교 결정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교사들이 학교를 설립한 궁극적 목적은 민족운동이나 교육 사업이 아니라 철저하게 선교적 사역으로 인식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양용근과 그의 맏형 양용이는 이 매산학교를 통하여 신앙을 갖게 되었다. 두 형제가 다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이 학교의 교육정신이 양용근을 순교에 이르면서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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