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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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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중국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청두시가 2020년까지 인공달을 공중에 띄워서 도시의 야간 조명을 대체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는 소식이 국내외의 언론들이 각각의 입장을 내면서 갑론을박하고 있다. 그 발상이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왜 그런 발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단순한 공상만은 아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지나치게 실용성만을 앞세운 발상과 과학과 경제에 지나친 자신감을 드러낸 허풍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프로젝트는 중국내에서 조차 비판하는 소리가 높다. 달빛보다 8배 밝은 인공달을 공중에 띄우겠다는 발상인데, 어디까지 실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단지 허풍과 망상으로 끝날지, 아니면 어떤 가능성을 보일 수 있을지 ...! 만일 정말로 달빛의 8배가 밝은 달이 공중에 떠서 도시를 밝혀준다고 하면 과연 생태계의 문제는 없을지? 그리고 사람의 신체와 생활리듬에는 어떤 문제가 없을지? 밤은 밤이어야 하고, 낯은 낯이어야 하련만 인간은 실용성을 내세워 달마저 인공을 만들겠다고 한다.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언젠가는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인공달과 관련해서 전해진 뉴스를 통해서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언젠가부터 잊고 지냈던 달빛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달빛의 멋과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무관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공달을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왜 하필이면 달인가는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 같다.

1년 중 매일 경험하는 태양빛이 계절을 따라서 다른 것처럼 달빛 역시 계절 따라서 다른 느낌과 밝기, 크기가 느껴진다. 물론 어디에서 맞는 달빛인가에 따라서 그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태양빛이 강렬한 것이면 달빛은 은은하다. 대조적인 느낌이 주는 분위기는 주변 환경에 따라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대지에 눈이 덮인 겨울날 밤에 내리는 달빛의 차가움은 삭풍의 느낌을 더한다. 또한 눈 위에 내리는 달빛은 마을에 개짓는 소리와 함께 적막함 속에 생명을 느끼게 한다. 또한 가장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 달빛의 색깔도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달빛의 아름다움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것은 아마 8월(음력) 보름이 지난 다음달, 즉 9월(음력)의 달빛이 아닐지. 아직 차갑지 않고, 그렇다고 8월의 보름달처럼 마냥 부드럽지만도 않은, 그러면서도 포근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달빛이 깊은 산중에 내리면 모든 것을 잊은 채 거기에 머물고 싶어진다. 아직 완전히 단풍이 들기 전인 나뭇잎들이 파스텔톤의 색채를 시작할 때 그 숲에 내리는 달빛은 특별하다. 그냥 달빛이 달빛이지 뭐가 그렇게 다를까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9월의 달빛은 특별하다.

그러나 그 달빛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다. 있다고 할지라도 달빛에 젖을 수 없고, 그 빛이 주는 느낌에 머물 수 없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경험했던 대지에 내리는 달빛을 바라며 온밤을 지새울 수 있었던 그런 느낌은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러한 분위기를 맛볼 수 없다. 인간이 만든 불빛이 달빛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무슨 빛이 됐든 빛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니 달빛이 주는 아름다움은 잊은 지 오래다. 밤하늘을 우러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 그럴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도시의 환경 때문에 도시의 사람들은 달빛이 주는 기쁨은 모른다. 다만 지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가로등과 보안등이 중요하고, 필요할 뿐이다. 하여, 인공달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닐지? 인공달을 띄울 수 있다면, 그리고 원하는 밝기의 조도를 확보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냐는 뜻을 가지고 인공달을 청두시 상공에 띄우겠다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가로등을 모두 없애고, 도시 전체를 달빛으로 대신하겠다고 하는 발상은, 행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달빛이 주는 느낌까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빛마저 유용성만 생각한 발상은 달빛이 주는 추억마저 실용이라는 가치로 대신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달빛보다 밝으면 환경과 생태계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도 달빛이 주는 아름다움과 정서적 평안, 그리고 그 달빛과 함께 누릴 수 있었던 추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자라면서 형성되는 정서적인 요소들이 인격과 삶에 얼마나 큰 것인지 도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공달에 관한 소식 때문인가? 9월의 달빛이 내리는 날 달빛을 맞으러 가고 싶다. 가을이 깊은 날 은은하게 내리는 빛은 온 대지를 품기에 그 안에 머물고 싶다. 멀리 있어도 멀리 있지 않고, 가깝게 있어도 가깝게 있지 않는 듯 대지에 가득히 내리는 달빛은 그 자체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가끔씩 무엇엔가 반응하는 개짓는 소리가 고요를 깨운다. 그러나 이내 달빛의 품에서 적막하지만 고요가 주는 평온이 밤을 지새우게 한다.

달빛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것에 담긴 은혜를 헤아릴 수 있는 기쁨을 주셨건만 인공달을 띄운다면 그 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 언젠가 가을마저 완전히 가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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