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분류

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0).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양향모 목사

 

일본대학교 법률과를 졸업한 양용근은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귀국을 안 조선 총독부에서 사람을 보내어 상경하여 총독부 경무과에 근무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일본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한 우수한 인재로 마음만 먹으면 집안에서 원하는 대로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고 출세의 길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약소국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인이 천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으로서 당했던 비참함이 일본 정부에 동조하면서 살기보다는 조국의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 오사육영학당 설립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고향인 오사리에 세워진 영명(英明)학당의 활성화였다. 그동안 그가 배운 학문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받은 학대와 조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지한 조국의 동포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국의 동포들에게 알려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학당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양용이와 양용근 두 형제의 일본 출국과 당국의 제재로 인하여 학교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서 학교 운영을 정상화하기로 했다.

 

2. 공무원 생활

양용근이 귀국하여 취직을 한 곳이 고향 광양군 진월면 면사무소의 공무원이었다. 그가 총독부 근무까지 거절했는데 고향의 진월면 면서기가 된 것은 형님이 세운 영명학당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서였다. 양용근이 귀국한 후에 영명학당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당국에 정식으로 허가를 신청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허가를 거절했다. 당국이 학원의 허가를 내 주지 않는 이유는 학원 시설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것을 내세웠으나 사실은 양용근이 요구한 교과 내용이 당국의 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당국에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야간으로 교육을 할 것과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양용근은 주간에는 아동들에게도 교육을 하게 해 줄 것과 조선말을 쓰게 하고 성경공부까지 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허가를 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국의 학원 허가를 촉구하기 위해서 면사무소로 찾아가 면장과 면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면장은 양용근에게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일할 것을 권유했다. 면서기로서 일을 하는 대가로 학원을 허가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학원을 인가해주면 야간으로 학원을 운영하게 되고 면사무소 직원이 운영한다면 학원 허가가 빨리 나올 것이라고 했으며 양용근에게는 아까운 두뇌로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고시공부를 하여 더 큰 일을 하라고 권유했다.

양용근은 공무원이 되어서 일본을 돕겠다거나 고시공부를 하려는 마음은 없었지만 학원의 허가를 얻기 위해서 잠시라도 면서기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1930년 11월 27일부로 진월면사무소의 서기로 임명이 되었고 보직은 호적 계장이었다. 약속대로 1930년 12월 1일부로 학원이 인가되었고 그 이름은 영명(英明)학당에서 오사육영학원으로 바뀌었다. 학원이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 그는 만 3개월 동안 근무를 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3. 오사육영학당의 운영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 양용근은 교장으로 취임을 했고 그가 교장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주변 마을의 학생들이 몰려왔으며 학제는 4년제였고 한 학급에 40명씩을 모집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학교의 재정은 순천에 설립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월정액을 보내왔고 학생들에게 교재비 정도로 받는 월사금과 동네 유지들의 후원으로 여유 있는 학교 운영을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 성경 등의 교육과 더불어 체육부 문예부를 두고 체육교육과 문예교육도 병행했다. 체육부에는 야구부 축구부를 두고 훈련을 시켰는데 축구부는 실력이 대단해서 경남 하동 등의 다른 지방의 학교들과 시합을 다닐 정도였다. 야구부도 순천 매산학교 학생들과 시합을 가질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문예부에서는 음악, 연극 등을 연습하여 매년 12월 25일 성탄절이 되면 운동장에다가 무대를 설치하고 이웃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하였으며 광양읍이나 순천 등지에서 초청을 받아 출장공연을 할 정도로 실력이 우수했다.

양용근이 학원 허가를 얻은 후 공무원을 사직하자 당국의 감시가 심해졌다. 당국은 여러 가지 지적사항을 시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본어 교육을 하기로 되어있으나 한국어로 교육을 한 것과 성인만 야학으로 가르치라고 했는데 아동까지 교육을 하는 것을 지적했다. 또 성경교육을 함으로서 일본 황실의 존엄성을 훼손한 것과 교실에 일장기를 계양하지 않은 것 등을 지적하여 시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양용근은 조목조목 그들의 시정명령이 부당함을 항변했고 당국은 이런 항변을 하는 양용근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고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낙인을 찍고 감시를 하기에 이르렀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