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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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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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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이제는 잊혀진 것들 가운데 겨울날 꼭 필요했던 것이 있다. 설피라는 것이다. 그것은 눈이 많이 내리고, 한 번 내린 눈이 봄이 오는 날까지 녹지 않는 지방에서의 필수품이었다. 하여 겨울이 오기 전에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서 만들어놓아야 했다. 언제고 눈이 내리면 신을 수 있는 덧신으로 눈에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도록 고안한 것이다. 설피가 없이는 깊은 눈을 헤집고 다닐 수 없었다. 겨울에도 산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하고, 이웃마을을 오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수품이었다. 신을 것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이기에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했던 설피, 그러나 이제는 사전이나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필요한 방한화는 물론 용도에 따라서 다양한 겨울용 신발들이 개발되어있고,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준비하면 된다. 그러니 이제는 강원도에서조차 설피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설피를 신어야 할 일도 없다. 설피가 꼭 필요했던 것은 신을 것이 변변치 않아서 눈에 빠지면 발이 젖고, 눈이 깊어 빠지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방수가 되는 것은 물론 부츠를 신거나 패치를 차면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또한 눈이 예전만큼 내리지 않기도 하고, 굳이 눈 속에 할 일도 없으니 설피가 필수품으로서 위치를 잃었다.

강원도 인제의 내린천 중류쯤에 설피밭이라는 곳이 있다. 요즘은 곰배령으로 알려져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곰배령을 오르려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설피밭이라는 마을이다. 그만큼 눈이 많이 온다는 의미일 것이고, 설피가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곳에도 설피는 사용하지 않는다. 장식으로 만들어 걸어놓은 것은 볼 수 있어도 사용하기 위해서 설피를 만드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설피가 없으면 꼼짝을 못했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라는 의미이리라.

지난 목요일(13일) 이른 아침에 내리시작한 눈은 인천 시내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길에 따라서는 조금씩 달랐지만 언덕이 많은 길은 오전 내내 마비상태였다. 눈이 녹기까지 빙판으로 변한 언덕을 오르지 못한 채 헛바퀴만 돌리다 미끄러져서 추돌사고가 연발하면서 도로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제설작업과 염화칼슘살포를 하고 기온이 올라가 도로가 녹기까지 차량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아예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오후에 늦게 출근한 사람도 있다고 하고, 도로에서 몇 시간이나 갇혀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일 아침 볼일이 있어서 나서야 하는 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 일찍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스도 얼마가지 않아 막힌 길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려서야 갈아탈 수 있는 정류장에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차량들이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머지는 걸어가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눈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시간이었지만 걷겠다는 결정을 한 후 마음이 편했고 오랜만에 눈이 내리는 길을 걷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도로에 선 채로 기름만 때고 있는 차량들을 뒤로 하고 내가 먼저 갈 수 있었다. 걷는 내내 서 있는 차량들을 바라보면 속도전에서 이기는 기쁨이 느껴졌다. 기계화, 첨단화된 자동차일지라도 빙판길에서는 두 발로 걷는 나보다 결코 앞설 수 없었다. 집에서 일찍 출발한 덕에 걸어서도 나는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일 차를 가지고 나왔다면 차에 탄 채 속만 끓였을 것인데, 유유히 걸어서 제시간에 도착했으니 그 기분은 마치 어떤 경기에서 승리한 느낌이었다.

항상 경쟁하듯 급하게 다니는 것이 일상인데 차를 놓고 미끄럽지만 내리는 눈을 맞으면서 걸어가면서 느끼는 쾌감은 특별했다. 최첨단의 기술을 장착한 자동차들이 버둥거리면서 조정하는 대로 가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유유히 걸어서 앞서가고 있는 자신이 대견했다. 인간이 지혜를 통해서 개발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기에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지만, 정작 그것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이 될 것이다. 인간이 지혜로 필요에 따라서 개발한 첨단의 기계들이지만, 그것을 작동하고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툰드라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도 스노모빌(snowmobile)을 사용하지만 먼 곳에 갈 때는 개가 끄는 썰매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내내 같은 것이다. 스노모빌을 타고 멀리 갔다가 기계가 고장이 나거나 기름이 떨어지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가 끄는 썰매는 고장의 염려가 없다. 또한 연료가 떨어질 염려도 없다. 느려도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썰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잊혀진 설피지만 때로는 설피를 신고 천천히 걸으면서 생활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지. 무조건 발전되고 편리한 것이 다가 아니라는 의미다. 비록 실용도가 떨어지는 것일지라도 설피를 신고 걸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오히려 필요한 때가 아닐지.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멈추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때로는 설피를 신고 이웃마을로 마실을 갈 수 있는 여유로움이 풍요로움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의미다. 눈길을 걸으며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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