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분류

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1).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양향모 목사

 

오사육영학당의 교육은 단순히 글자를 가르쳐주고 무지한자들을 가르쳐서 잘살게 하는 농촌계몽운동 정도가 아니었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교육이었고 매일같이 성경공부를 했으며 진리를 가르쳐 신앙인으로 살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다. 양용근은 자신이 이런 기독교 교육을 하기에 부족함을 느꼈고 전도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아쉬움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고민 끝에 학교는 교사들에게 맡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양용근이 평양신학교로 부르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입학한 년도가 1934년 4월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35년 4월 5일에 입학한 손양원 목사와 입학동기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서 1935년이 더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 평양신학교 입학하기 전에 공부한 것으로 보이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종교교육부의 성경통신과 신약전과를 1935년 3월 20일에, 구약전과를 동년 4월 1일에 수료한 졸업증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과정을 졸업한 후 1935년 4월 5일에 손양원과 함께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 또 교회를 섬기면서 전라도지방에서 평양까지 다니며 학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제에 의해 건설된 기차가 1936년 12월 16일 순천까지 개통을 했기 때문에 순천에서 이리까지 전라선을 그리고 호남선으로 갈아타고 대전까지 갈 수 있었다. 대전에서는 만주 봉천까지 가는 기차가 있었기 때문에 기차를 이용하여 학교에 갈 수 있었고 학기 동안에는 평양 신학교의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방학 때는 교회로 돌아와 교회를 섬길 수가 있었다.

그런 어려운 형편 때문에 손양원보다 한 해 늦은 1939년 3월 31일에 34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서 1938년 9월 무기휴교를 선언하였다. 그로인해 수업을 하지 못한 한 학기는 통신과정으로 이수를 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1.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 설립과 발전

평양신학교는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1864~1939)에 의하여 1901년 평양의 자기 집 사랑채에서 시작되었다. 첫 학생은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던 김종섭과 방기창 두 사람이었다. 이것이 장로회신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04년에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4개의 장로교 선교부(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장로교)에서 공동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요청에 의해 장로회신학교로 시작 되었다. 신학생 수는 1902년에는 6명, 1904년에는 19명, 1905년에는 40명, 1906년에는 50명이 입학하였고, 학교는 점차 큰 발전을 가져왔다.

1907년 첫 졸업생 배출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는 4개 장로교 선부의의 정식허락을 받아 ‘대한장로회신학교’(Th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Korea)라는 공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 1908년에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는 매코믹 여사(Mrs. Cyrus McCormick)가 기부한 5천불로 평양 하수구리에 대지 6000평을 매입하였다. 그 땅에 2층으로 된 한옥으로 된 학교교사 건축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공을 하였고 1911년에는 기숙사도 완공하였다.

초기에는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 A. Moffett)과 같은 선교회 소속 이길함(Grmham Lee, 1861~1916)이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남장로교의 전위렴(William M. Junkin, 1865~1908), 캐나다장로교의 부두일(William R. Foote, 1869~1903) 호주장로교의 왕길지(Gelson Engel, 1868~1939) 등도 교수하는 일에 동참을 하게 되었다.

 

2.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신학사상

평양신학교 교수진은 매코믹신학교 출신이 9명, 유니온신학교출신이 6명,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 4명, 기타 5명이었다. 매코믹신학교 출신이 가장 많기도 하지만 초기부터 24년간 교장직을 맡았던 마포삼열이 매코믹신학교 출신이다. 또 초기 장로회신학교 교수는 거의가 매코믹신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매코믹신학교의 신학사상이 초기 장로교신학교의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수학한 신학교의 학풍은 당시 유럽의 비평신학의 도전 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하고 보수적인 신학을 교수한 신학자들이 포진한 신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자유주의적 비평신학에 대항하여 성경관을 변호하는 구프린스톤 신학체계 하에서 프린스톤신학교는 학생들에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전투적으로 변증하는 신학을 전수하였다. 맥코믹신학교 역시 프린스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한 보수신학을 학생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는 평양신학교의 학풍이 건전한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단서가 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단에 등용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보수주의적 신학적 배경을 가졌고 동시에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앙으로 무장된 이들이었다.

또 이들은 무디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로 하여금 전도 및 선교 정신을 심어 주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주의의 정신이 투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