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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콘스탄티노플의 통한(痛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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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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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옥 목사

 

이스탄불은 동로마제국 수도로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 이었다. 당시에도 콘스탄티노플은 동서교역이 활발한 지역으로 라틴문명의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초기 5대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서방 베드로성당에 견줄만한 동방 소피아 성당이 유명했다. 파리 로마 아테네는 긴 역사를 자랑하지만 결국 한 나라 한 문명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아스탄불로 개명되었고 그 이스탄불 바닥에는 그리스 문명이 중간에는 라틴문명이 맨 위에는 이슬람 문명이 쌓이고 뒤섞여 있다.

지금도 동서 문명의 교착점 답게 비잔틴 제국의 성소피아 성당과 오스만제국의 블루 모스크가 대치하듯 마주보고 있다.

오스만 제7대 마호메트 2세는 부황이 덜컥 은퇴선언을 하는 바람에 겨우 12살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린나이에도 야망이 불탔으나 능력이 없으므로 조급하고 난폭했다.

수박도둑을 잡아내겠다고 수십 명의 시종 배를 갈랐을 정도였으며 툭하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고 고함을 쳤다.

사사건건 조정 대신들과 대립 충돌하다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군대도 그의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계획에 반발했다. 결국 그는 폐위되어 시골로 쫓겨났다.

그러나 5년 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고 처음 한 일이 이복동생을 교살했다. 이런 마호메트 2세의 등장에 콘스탄티노플은 긴장하고 서유럽과 바티칸도 우려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것은 마호메트2세가 자기를 쫓아내자고 간청했던 대제상과 부왕의 가신들을 그대로 유임시켰고 대외적으로 유순했다.

부왕이 맺은 기존 조약을 그대로 승인했고 비잔틴제국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코란에 손을 얹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런 청년이 기독교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전무 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의 연극이요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가 제상들을 유임시킨 것은 아무 때나 마음만 내키면 제거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 공손한 것도 대규모 전쟁을 준비할 동안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타고난 본성이 다소 변한다 해도 그것은 은혜가 충만할 때 뿐 이지 순간에 본성은 그를 사로잡고 만다. 그는 젊은 사람 답지 않게 간교하고 신중했다.

드디어 1453년 4월 6일 오스만 제국의 공세가 그의 명령으로 시작되었고 5월 29일 개전 52일 만에 천년왕국 콘스탄티노플이 역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호메트 2세가 불과 21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가장 현명하고 올바른 군주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내려는 베네치아 해군의 활약도 대단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호메트 2세는 계속 전쟁하여 영토를 늘려 아버지 때보다 2.5배나 넓혔다. 그가 정복전쟁 원정도중 나이 45세에 죽었으니 그만하였지, 만약 그가 5~10년만 더 살았다 해도 오스트리아 빈이나 로마도 이슬람의 깃발에 짓밟혔을 것이다.

언제나 적은 교활하고 기만전술에 익숙하다. 우리의 대적들은 마귀의 속성을 닮아 간교하고 교활하고 집요하며 결정적인 때에는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난폭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국가는 언제나 깨어 경계하며 내실을 튼튼히 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 역사에는 만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근자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는 결코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와 서방세계처럼 코란 위에 손을 얹고 맹세했던 마호메트 2세 같이 간계를 쓰는 자에게 기만당하거나 그들에게 농락당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역사는 빼앗기고 잃고 나서 후회하는 자의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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