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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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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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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꼭 100년 전 3월 1일은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지에 대항해서 온 국민이 저항했던 3.1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해이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 대략 1800만 명쯤으로 보는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를 보면 기독교가 16명, 천도교가 15명, 불교가 2명이다. 그러면 당시 우리나라의 종교분포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가 약 20만명, 천도교가 300만명, 나머지는 불교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훨씬 많았고, 가장 많았던 것은 유교였다. 유교는 조선 500년을 지배한 종교로서 당시 우리나라의 종교를 대표했다.

하지만 정작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겨우 국민의 1% 남짓한 기독교였다. 동학혁명 이후에 백성의 지지를 받는 종교로 변신한 천도교는 당시 신흥종교로서 개혁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17% 이상의 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사실상 경제적 지원은 천도교가 감당했다. 기독교는 교세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정도였지만 전국적인 조직력과 젊은 학생들, 그리고 신학문의 영향을 받은 신지식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제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의 시점에서 보면 두 개의 신흥종교인 기독교와 천도교가 이 운동을 주도했고, 그 결과 우리 민족의 의식을 깨우치고, 만국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일을 감당한 것이다. 하지만 천도교는 동학혁명 세력이 종교화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인 혼합종교가 됨으로써 더 이상 발전하지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불과 1.2%정도 밖에는 안 되는 매우 작은 종교였지만 독립운동은 물론 우리 민족의 의식을 깨우쳐서 끝까지 일제에 저항하면서 끝내는 해방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지도력의 중심 역할을 감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환경을 개척해나가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중심에서 그 역할을 감당했다. 당시에는 신흥 외래 종교였고, 남북한을 합쳐서 20만 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적은 수의 기독교가 식민지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천명하는 독립선언문 정신을 앞세워 민족을 깨우쳤고, 일제에 저항하면서 민족의 소망이 되었다.

그 결과는 일제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더 강화하게 했다. 즉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강화했고, 1936년 이후에는 기독교 말살정책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은 강제로 추방을 시켰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작업은 일본의 패망과 비례해서 더 가혹해졌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예배의 자유조차도 박탈했고, 군국주의에 의한 교회와 신앙의 통제가 일부 기독교도들에게 지하신앙으로 숨어들어가게 할 만큼 심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해방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는 50만명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독립만세운동 이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점점 가혹해졌음에도 20만에서 50만으로 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이다.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한국교회를 스스로 돌아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기독교는 오히려 성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당시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을 주었다는 의미 일 것이다. 아주 작은 신흥종교였지만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 민족에게,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었던 당시 유일하게 소망을 갖게 했던 것이 기독교였다는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우리 국민에게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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