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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해악과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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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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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옥 목사

 

타임즈(The Times)에 돈 많은 노인이 신문에 광고를 냈는데 ‘파란색 얼룩말을 가져오면 100만 불을 주겠다.’는 가십기사가 있었다. 이를 두고 각 나라 사람들의 반응을 꼬집어 다음과 같이 표현한바,

첫째, 독일인은 ‘파란 얼룩말이 어디 있을까’ 하고 도서관으로 달려가는 연구파랍니다.

둘째, 영국인은 서점에 가 아프리카 지도를 사는 탐험파

셋째, 미국인은 고물상에 가서 사냥총부터 사는 행동파

넷째, 프랑스인은 말 한 마리를 사서 파란색 페인트칠을 하는 기교파

다섯째, 일본인은 말에다 파란 털 이식수술을 하는 잔재주파

여섯째, 스페인 사람은 술 한 잔부터 미리 마시고 시작하는 흥분파

그런데 한국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에이, 정말로 100만 불을 줄까?” 하고 의심하는 불신파라고 정의를 내렸다고 한다. 불신이 만연하고 심각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편하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강아지를 데리고 다녔다. 그것은 그가 동물 애호가여서가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먼저 강아지에게 시식시켜보고 이상이 없으면 안심하고 먹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한 순간도 믿음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상호간에 불신하다보니 서로 의심하고 갈등하고 서로 상처까지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첫째, 불신하면 결국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된다. 한 남자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갈한 목을 축일 물 한 방울도 없었다. 그러나 비몽사몽간에 눈앞에 야자나무 숲이 나타났다. 물이 솟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그는 내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해... 환상에 불과해...’ 그리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 후 이 오아시스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쓰러져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이처럼 불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둘째, 상호가 불신하면 같이 둘 다 망한다. 고목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큰 나무 위에는 매 가족이 살고, 나무 밑에는 산돼지 가족이 살았다. 이렇게 별 불편 없이 잘 사는데 못된 여우가 이간을 시켰다.

매에게 달려가 “이 나무 밑에 사는 돼지가 밑동을 갉아 나무가 쓰러지면 네 새끼들은 돼지 밥이 되고 말거야!”

그리고는 돼지에게로 가서 “이 나무 위에 사는 매들이 너희 새끼들을 잡아먹으려 날마다 주위를 돌고 있는 거야!” 속살거렸다.

이렇게 되자 매 가족이나 돼지 가족은 서로를 불신하여 경계하며 새끼만 지키다가 결국 굶주려 죽고 말았다. 매 가족과 돼지 가족은 상호불신하다 결국 여우 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신론자로 자처하며 악을 쌓다 죽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년 ~ 1776년)은 회의론자로 유명했다. 그는 악마적인 반신론자였다. 반기독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대해 ‘그는 내가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해서 나를 지옥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그를 지옥에 가서도 반항하겠다.’라고 막말을 쏟아 냈다. 얼마나 강퍅하고 얼마나 못된 악마적인 발악인가 말이다.

19c 영국의 과학자 토마스 헨리 헉슬리는 무신론자로서 진화론을 옹호하며 자신이 ‘찰스 다윈의 불독’이라고 악의를 가지고 교회를 대적했다. 그는 종교 논쟁 중에 ‘당신의 조부모 중 어느 쪽이 유인원과 친척이냐?’ 할 때 ‘상대를 조롱하는데 재능과 영향력을 사용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유인원을 조부모로 택하겠다.’고 독설을 내뱉을 정도였다. 아무리 부유하고 학식이 있다 해도 당연히 믿어야할 진실을 의심하고 엄연한 진리를 거부하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억지를 믿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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