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분류

표현되지 않는 마음은 무효다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장자옥 목사

 

사람은 이상하게도 사이가 가까워지고 친밀해질수록 자신이 원하는 걸 함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이 정도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 줄 거야’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또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어야 하는 게 사랑 아니겠는가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현명하게 상대의 마음을 다 읽어내고 알아챘으면 더 없이 좋으련만, 잘 알아내지 못해서 좋았던 사이가 뒤틀리고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 갖기 어려운 독심술을 요구해놓고는 기대하다가 끝에는 성의가 없어서 그렇다고 오해하거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마지막까지 불화의 책임을 떠넘기기도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우리 크리스천들도 실제는 자신이 입을 열어 기도하지 않으면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너무 쉽게 하나님께 원망하며 불만을 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시인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인지 어른이 되어서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역사상 고백하지 않고 이루어진 사랑은 어떤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흔히들 은근과 끈기가 우리민족의 특징이라고 말하지만 갑돌이와 갑순이처럼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아름다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노래를 잃어버린 새는 새가 아니며, 울리지 않는 종은 이미 종이 아니다.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은 선물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이미 함량미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한다. ‘표현되지 않는 마음은 무효이며 고백하지 않는 사랑도 공수표다’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상호 커뮤니케이션 원리가 녹아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전능자이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요구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 경우는 바울사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린도교회는 우리가 아는 대로 분쟁이 많았다. 철학이 만연한 세상이었는지 심지어 교회를 개척하고 말씀을 전해준 바울사도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교인 중에는 바울사도를 모함하고 비난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문제는 그걸 보고도 어정쩡하게 방관하며 일부는 동조까지 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했으며 특히, 6:11~13에서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 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 간곡하게 호소하셨다. 감사하고 다행한 것은 고린도교인들이 바울의 심정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울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 바울사도를 주의 종으로 깍듯하게 영접하였다는 사실이다. 어려울수록 마음을 열고 경청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그 뜻을 모두 표현하셨다. 그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그 뜻을 표현하신다. 예수님도 그랬고 바울사도께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만 표현하시고 말씀하시는 일방통행이 아니고, 때로는 우리 마음과 소원과 뜻을 친히 마음을 여시고 경청하시고 응답하신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있다’ 라면서 마음의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남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시대는 죽의 장막도 철의 장막도 아니다. 오늘날 폐쇄된 공간은 사람이 사는 올바른 세상일 수 없다. 이 시대는 오픈된 세상이다. 열린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상대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은 물론 상대도 나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기꺼이 열 수 있도록 정확하고 자애롭고 친절한 메시지를 표현해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결실이 가능한 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