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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 지독한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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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영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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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판사께서 결혼 주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발탄을 쏘고 말았답니다. “오늘 복된 날을 맞이하여 피고 김말동 군과 원고 이살롬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는 토요일 아침에 장례식을 집례한 후 오후에 결혼식을 주례하며 이렇게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고(故) 김말동군과 이살롬양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조류학자는 한 술 더 떠 커피 한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할 때 꼭 한발을 든다고 합니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조류 박사(?)는 낮에 잠시 잠을 잘 때에도 서서 한 발을 든다고 하니 대단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이런 무의식세계는 우리들에도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무의식이 의식세계에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술좌석에서의 직책에 따른 생각과 행동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장은 술집에서도 새로운 계약 성사에 정신이 없고 술상무는 술 마시는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 과장은 눈치보기에 정신이 없고 말단사원은 술병 헤아리기에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그 누구 혹은 무엇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집중해야 합니까? 즉 늘 집중하던 그 무슨 무의식 세계가 있어 어느 순간 의식세계로 표출되어야 하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내면세계는 무엇이겠습니까?

늘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면세계입니다. “바라본다”는 의미는 “계속하여 집중한다.”입니다. 마치 100m 달리기에 참가한 선수가 오직 결승점 도착과 동시에 수많은 경쟁자들 가운데 우승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간절히, 즉 간이 절일 정도로 집중하여 달리듯이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그 어느 생각, 어느 사람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집중력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를 닮아가고자 하는 삶이 바로 성화의 생활입니다.

그래야 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조직과 문화의 흐름 뒤에는 비기독교적이요 적그리스도적인 요소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 잠시 넘어지더라도 아주 자빠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낙심과 좌절 그리고 실망과 원망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집중해야 할 이유 중 제일 큰 이유는 그 예수님을 통하여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제일 확실한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마지막 대상은 오직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인 것처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때론 우리를 향하여 지독한 짝사랑까지 하십니다. 우리들이 그런 사랑이 도리어 부담이 된다고 등을 돌리는데도 말입니다. 오직 그런 사랑의 예수님를 향한 내면세계의 집중만이 패배주의와 냉소, 그리고 염쇄적 삶이 이미 빠져 들어가고 자신을 구할 수 있는 비결 중에 비결입니다.

사방이 꽉 막힌 여자는 엘리베이터걸입니다. 제일 무서운 상사는 불상사입니다. 성도로서 제일 큰 불상사는 무엇입니까? 전혀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모시지 못하며 그 분 없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주님과의 열열한 연애가 시작되는 계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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