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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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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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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요즘은 자주 어떤 개념을 포괄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내게 생긴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 하나가 ‘합력’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가 갖고 있는 물리학인 의미는 “동시에 작용하는 둘 이상의 힘과 효력이 같은 하나의 힘”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용해본다면 아주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한다.

요즘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자신의 것을 절대화 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네편과 내편, 아닌 것과 긴 것, 흑과 백 등, 이러한 프레임에 몰아넣고 어떤 것을 절대화한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가당착에 떨어지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나무가 죽어서 썩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죽은 것, 쓸데없는 것, 생명이 없는 것, 소망이 없는 것, 나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한 그루의 나무가 죽어서 썩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생명체들이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서 자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미 죽어서 썩은 나무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인가? 또한 그 죽은 나무가 없이 지금 살아있는 나무의 생존이 가능한 것인가?

이때 죽은 나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래서 필요 없는 것이고, 냄새나는 것이고, 단지 무가치하고 귀찮은 것인가? 그래서 틀린 것인가? 죽고, 썩어가는 나무일지라도 그것이 있었고, 썩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 나름의 역할이 있기에 주변에 함께하는 것들까지도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존재의 의미를 다름에서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다름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존재와 목적을 위해서 다름을 부정하게 한다. 물론 결코 본질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양보할 수 없는, 다름이 아닌 틀림의 가치는 예외로 하고, 그것이 틀림이 아니며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인간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악한 것과 선한 것으로 나뉠 수 있는 가치관, 윤리관, 사상, 나아가 관습도 각각 달리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과 다른 더 복잡하고 힘든 일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아닌 것은 모두 틀린 것인가? 또 나쁜 것인가? 결코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자신에 있는가? 그럼에도 현실은 네편과 내편을 단언적으로 구별하려고 한다. 그렇게 구별할 때 좋다고 한다. 그러한 프레임을 전제로 자신의 편을 만들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과정과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사람의 가치관과 사상, 윤리의식을 모두 획일적으로 O와 X로 나눌 수 있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뿐이리라.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게 O와 X로 프레임 안에 자신을 담을 수 없다. 물건이라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할 수 있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을 그렇게 프레임에 가둬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내포하고 있는 즉, 교집합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있어야 하고 필요한 부분이지만 프레임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안 는다.

그런데 우리국민이 이렇게 단순한 사고에 유능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조선 후기부터 근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이 경험해온 시대의 산물로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에는 적어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서로에게 O와 X의 프레임 안에 가두려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더 아프고, 더 절망한다.

그러나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 한에 있어서 혹여 불완전하거나 때로는 나쁜 것 까지도 나름의 역할을 통해서 전체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때 악한 것, 혹은 나쁜 것을 장려하거나 기대해도 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족한 것은 그것대로, 혹여 입장이 다른 것을 다른 대로, 각각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존중하고, 성찰하면서 ‘합력’을 해야만 인간으로서 삶이 보장될 수 있지 않을까? 부족하기에 ‘너’가 필요한 ‘나’인 것을 각자가 인정한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국민 전체가 O와 X로 나뉘어서 서로 갈등하면서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어진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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