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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밝고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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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자옥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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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날인 2005년 4월 20일, 인천시로부터 제 3회 ‘장애 극복상’을 받은 김진희(37세)씨.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97년 3월 21일, 아침 학원으로 출근하던 길이었어요. 중앙선을 넘어온 5톤 트럭이 제 승용차를 덮쳤죠. 결혼식 한 달 전이었어요.” 대학 졸업 뒤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결혼의 꿈을 키우고 있던 그녀는 이 사고로 왼쪽 무릎 아래 다리와 왼쪽 눈의 시력을 잃고 다른 곳도 거의 성한 데가 없을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1년 8개월 동안 입원했고 지금까지 스물여덟 번이나 이식수술을 했다.

결혼을 포기하고 굳세게 살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휠체어를 탄 책 언덕에서 굴러보기도 하고, 청소용 세척제를 마셔 보기도 하고, 머리를 벽에 부딪혀 보기도 했다. 그럴 때 마다 김 씨의 어머니는 “넌 꼭 할 일이 있으니 살아야 한다”며 의족을 끼워주고 걸음마를 가르쳤다. “엄마의 발등에 내 두 발을 올리고 꼭 껴안은 채 엄마의 걸음을 따라 걸었어요. 그러다가 잘 안 돼 쓰러지면 괜스레 엄마를 트집 잡아 싸우고......”

포기할까 생각이 들던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우연히 어머니의 발등을 보게 됐다. “두 발등에 시커먼 자국이 있기에 저는 숯검댕이가 묻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멍자국이더라구요. 당신보다 덩치가 큰 저를 발등에 올려놓고 매일 걷느라 생긴.......” 김씨는 그 날부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혼자 걷는 연습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갔다. 2000년 3월부터는 몸 부위가 잘린 절단 장애인의 모임을 만들어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권리를 찾는 일에 나섰는데, 이제는 회원이 9천명이 달한다고 한다. 이들과 함께 그녀는 값비싼 장애인용 기구들을 서로 나눠 쓰는 운동 등을 벌이면서 틈틈이 장애인들의 현실을 취재하고 글을 써 라디오나 신문에 기고하고 있다. 베트남에 휠체어 20대를 기증하고, 혼자 두 달 동안 유럽 배낭 여행을 하고, 장애를 딛고 당당히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25명꼴로 절단 장애인이 생겨나는데도 의수, 의족 수준은 한참 뒤떨어져 있고, 정부의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밝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자’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는 그녀는 ‘장애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는 9월 연세대에서 장애인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 장애인으로 세계사에 뛰어나게 활동한 사람은 많았다. 시인 바이런은 다리를 절었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소아마비로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고 휠체어를 탈 정도였다. 펄벅 여사는 장애인 딸을 두었고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나경원 의원도 장애인 여아를 두고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를 보니 미국의 한 남자는 사고로 뇌를 다쳐 시력이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채색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몇 개월의 노력 끝에 튜브의 색깔을 손 끝에 짜가지고 그것을 엄지와 검지로 비벼보면서 질감으로 색깔을 구분하고 이제는 배색까지 하면서 주로 얼굴 눈 부위를 그리는데 미국이 주목하는 화가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성경에 보면 야곱과 바울이 장애인이었다. 바울은 간질병에 안질까지 심각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진 보행 장애인이었다. 필자도 사실 오른쪽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린애였던 6.25때 무슨 의료혜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감사한 것은 오른쪽 눈이 장애여도 외상으로는 크게 표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왼쪽 눈에 다리끼 한 번 나지 않고 그 시력이 지금도 1.0 이다. 두 눈 가지고 너무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면 목회자가 아니라 형사가 되었을 지 모른다. 한 눈으로 밖에 못 보니 남의 허물을 다 볼 수 없으니 그것도 감사할 뿐이다. 장애는 극복될 과제이지 인생 자체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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