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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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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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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요19:1~3)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영웅의 심벌이 아니다. 잔인한 일감에 굶주렸던 로마 군병들은 촌극을 구상했다.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혔다. 가시로 된 왕관을 씌웠다. 소리 높여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희롱하며, 절하고 갈대로 치며 침을 뱉었다.
거기엔 별다른 악의도 없고 어떤 심각성도 없다. 그러 장난질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이 쓰라면 쓰고 입으라면 입음으로 그들의 흥겨움을 방해하지 않으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셨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흥은 깨졌을 것이다.
이것은 빅토르 위고의[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콰지모도라는 꼽추의 비극은 침팬지같이 추한 얼굴에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백치였기에 도무지 가지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 꼽추는 주위로부터 소외 당한 채 언제나 종탑 방 속에 갇혀서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한번은 그가 밖으로 나갔다가 거지 떼의 축제 속에 끼어들게 된다. 그는 나름대로 침울한 순간이었는데, 군중은 그를 붙들어 축제의 왕으로 삼고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고 그를 어깨에 태우고 퍼레이드를 벌였다. 여기에서 꼽추는 너털웃음을 지어야 한다. 그럴수록 군중은 그의 꼴이 재미있고 흥겨워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환호를 한다. 그는 그로테스크한 표정으로 웃어버리지만 정작 그것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지 못할 그런 표정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노리갯감이 된왕, 임금 아닌 임금, 억지로 뒤집어씌운 왕관, ...비록 몇 시간의 촌극이지만 여기에 그분의 고난의 의미가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님은 왜 오열을 씹어 삼키며 침묵하셨는가? 왜 그 오욕의 왕관을 벗어 팽개치지 않으셨는가? 그에게 거짓 왕관을 씌우고 그분에게 그토록 진한 침묵을 강요한 사람이 로마 병정이었는가? 아니고 영화의 권좌를 누려 보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에게 왕이 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원이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분이 침묵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분의 입을 제자들이 아니 오늘날 불경건한 신자들이, 피 묻은 인류의 손들이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대하는가? 참 경건함과 순백색 마음으로 단장하고 그분에게 말씀하시도록 기회를 드렸는냐는 말이다.
주일마다 새벽마다 10년, 20년을 그 발 아래 절하면서도 내 용심, 내 관념, 내 척도에 의해서 예수님께 억지 왕관을 씌운 일은 없는가?
교회를 위하는 듯하면서도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부르면서도 오히려 내 소리를 높이고, 내 욕심을 드러내고, 내 주장만 내세우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의 말씀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여지를 없애지는 않았는지 회개하는 심정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군인들과 군중의 희롱이다.
그들은 단지 예수께서 왕이 되려고 하신다는 맹랑한 풍문을 그대로 믿고 그분을 비난하고 때였다. 그가 정말 왕이 되려했는지 혹은 정말 왕인지, 그분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을 마치 떠돌아다니는 여론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믿고 그것을 말거리로 삼아 조롱하고 수군거리는 오늘의 대중과 차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소문과 여론의 무거운 바퀴 밑에서 억울하게 단죄를 받고 신음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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