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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판단의 기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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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규진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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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달라스 소재 남감리교대학교(SMU)에 공부하러 갔을 때의 일화다. 거주지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떨어진 베드포드라는 곳에 다녀올 일이 있어서 출발에서 도착까지 거쳐야 할 길을 조사했다. 그 중에는 달라스 외곽을 순환하는 루프 12라는 길도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어서 기억해 두었던 루프 12에 잘 접어들었다. 그런데 10여 분 운전을 한 후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의 좌우 풍경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루프 12로 접어든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그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범하는 실수가 이것이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세한 분별에 실패함으로써 실제에 있어서는 의도된 방향의 반대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축복신앙과 기복신앙의 차이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판단의 기준의 문제가 등장한다. 요즈음에는 네비게이션이 등장해서 운전 실수의 걱정은 없어졌다고 하지만,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배척했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감격하고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자세로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육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 앞장섰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진노하였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조율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판단의 기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되어 있고, 1,189장에 31,171절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다. 그 중에는 역사적 기록에서 시, 잠언, 서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되어 있고 삼십 여 명의 기자들에 의해 수천 년 동안 기록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가진 책에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의 근본적 기준이 될만한 것을 찾아낸다는 것을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다음 성구를 읽는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39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성경이 증언하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하고 풀어가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젠 답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의 의문은 여전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라는 주장이 단순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성경만 해도 66권 중에서 4권이나 된다. 네 권의 복음서들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일화도 적지 않다. 물론 근본적인 판단 기준을 찾으려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힌트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마태복음 4:23은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가르치고, 선포하시고, 고치셨다는 세 가지 동사로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는 마태는 그 세 가지 중에서도 가르침에 중요성을 더 부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필요한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그러나 아직도 막막하다. 왜냐하면 복음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흩어져 있는 가르침들 역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이유로 예수님이 주신 가르침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점을 잘 요약해서 제시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7장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풀기로 한 문제에 대한 해답에 근접했다. 남은 과제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잘 이해하는 일뿐이다.
아직도 남은 문제가 만만치 않다. 앨버트 슈바이쳐 박사는 산상수훈을 종말을 직면하고 있는 비상한 상황에서만 실천할 수 있는 윤리라고 해석했다. 그렇지 않고는 오리를 억지로 가자고 하는데 십 리를 가고,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등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다. 실은 그렇지 않고 오직 예수만이 주실 수 있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통찰이라는 것도 입증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에 풀어야 할 숙제로 남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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