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분류

목회자칼럼 |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작성자 정보

  • 장자옥 목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근간에 카톨릭 성직자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하다. 그분이 그렇게 추앙을 받는 배경에는 결혼을 않한 신부님이셨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맘대로 하는 그것을 절대하지 않는 사람을 추앙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더 어렵고 힘든 것은 결혼한 목사가 이산가족이 되어 혼자 산다는 것이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국민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매스컴의 역할이었다. 

TV나 신문은 한 사람을 영웅 만드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다. 미국 쇠고기만 해도 MBC나 KBS TV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방영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장기려 박사님도 김수환 추기경 못지않는 성자였으나 매스컴이 발달하지 못한 때에 살았을 뿐이다. 평생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예수의 사랑과 인술과 복음을 펼쳐온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張起呂) 박사(1909-1995)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1909년 평안북고 용천에서 태어나 1932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1940년부터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와 평양도립병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생한 해 12월 부인 김봉숙 여사(84세, 당시 39세)와 5남매를 남겨둔 채 2남 가용(60세, 사울의대교수)씨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했다. 그는 1951년 5월 부산 영도구에서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현 고신의료원)을 세우고 피난민과 전상자를 돕기 시작했다. 그간 서울의대, 가톨릭 의대, 부산의대 등에서 강의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였고, 1976년에는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무료진료를 하는 등 그의 인술을 펼치는 사업은 끝이 없었다. 부산 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사기장,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수상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 명씩을 진료해 주다가 86세 되던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산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을 받은 장기려 박사님 그는 첫째로 이산가족의 아픔과 고통의 대명사였다. 그는 이북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남매를 두고 월남한 후 47년 동안 줄곧 재회의 소망을 품고 외롭게 살았다. 아내와 가족이 아직도 평북 강계에 살고 있음을 1991년에 확인한 장 박사는 남북 적십자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도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이 있을 때마다 제1번으로 신청하곤 하였다.

1991년에는 미국에 있는 조카들을 통해 실로 45년 만에 부인의 편지와 가족사진을 받았고 카세트테이프를 통한 부인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노래와 “통일이 될 때까지 죽지 말고 꼭 살아달라”고 한 애절한 육성을 듣고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간접 상봉만으로 아쉬운 재회의 한을 남긴 채 하늘나라로 갔다.

둘째, 그는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6․25의 전화(戰禍)속에 버림받은 사람과 가난한 이웃들을 무료로 치료해주었으며,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줄 돈이 없자 수표를 선뜻 건네주기도 했다. 그리고 추운 방에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며느리가 해온 이불을 들려 보내기로 했다. 때로는 병원비가 없는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주며 빠져 나가게 해주기도 했다. 그는 영세민 진료를 평생 즐거움으로 시행했고, 1968년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잘 운영하여 1989년 정부 차원의 의료보험제도가 정착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셋째, 그는 지순한 사랑의 신사였다. 어쩌면 이 시대에 남은 최후의 로미오였다. 춘원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 될 정도로 미남이고 선망의 직업을 가졌던지라 얼마든지 재혼하여 가정의 안락한 행복을 다시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재혼의 권유를 물리치며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라고 말해 왔다.

만년에 그는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참 사랑을 해왔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도 영원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하며 늘 푸르른 순정을 간증했다. 47년을 수절한 외로운 신사요, 고결한 어른이요, 고아의 인자한 아버지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요, 유능한 의사요, 가난한 성자였던 그를 우리는 길이 사랑할 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