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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과 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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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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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26.> 


도심에서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지금 농촌에서는 가뭄으로 인해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주말에 장마전선이 북상한다는 소식은 있지만 당장 105년 만의 가뭄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힘들게 가뭄과 싸우고 있다. 관정을 파는 수고는 물론이고, 물이 있는 곳에서 수 킬로미터를 호수를 연결하여 끌어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농작물을 살릴 수 있다면 고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표현에 경외심마저 든다.
그렇게 해서 끌어온 들 농민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되기에 그렇게 까지 수고하고 애쓰는 것일까? 하지만 농심(農心)은 단지 주어지는 대가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심은 생명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심은 작물이 싹이 나서 자라고 있는데 비가 오질 않아서 고사(枯死)하거나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파하는 것이 농심이다. 그렇다고 짐승들처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묵묵히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면서 모질게 라도 살아남기를 위해서 애쓰는 작물들의 모습에 농심은 아프다. 마치 자신이 아픈 양, 자신이 목이 마른 양, 절체절명의 순간을 느끼는 듯 안절부절 한다. 따라서 농민들은 더 마르기 전에 물을 한 바가지라고 더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물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 줄 수 없는 현실 앞에서는 망연자실 한다. 밤잠을 자지 않으면서 물을 끌어오는 작업을 했건만, 그마저 수원(水源)이 말라서 더 이상 물을 끌어올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한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원망어린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리고 작물들을 바라보면서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떨군다. 할 만큼 했지만 더 이상 물을 대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표정이다. 한 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애써 고개를 돌린다.
100여 년 만의 가뭄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새삼 물의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도시에 살면서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일이 없다면 물에 대한 간절함을 느끼지 못한다. 수돗물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물 걱정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아낌없이 쓸 수 있도록 나오는 물은 수도꼭지만 틀면 언제든지 필요를 채워준다. 그렇기 까닭에 평소에는 물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농촌에서는 물과 전쟁을 버리고 있다. 물과 사투를 버린다고 할 만큼 처절한 현실이다. 물이 있을 만 한 곳이면 어디든 판다. 수고는 물론 경비가 많이 든다. 하지만 원하는 지하수를 찾지 못하면 그마저 아무런 보람이 없다. 그럼에도 관정을 파는 일은 쉬지 않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물을 찾을 수 있다면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일 수 있다는 생각만이 농심을 사로잡고 있다.
농민들이 물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익을 위한 투자나 수고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입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그들이 물을 찾고 있을 때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경비와 순수익이 얼마나 될 것인지 계산해보고 물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투자비와 순수익의 관계를 따지기 전에 자신이 심은 생명이 죽는다는데 더 관심이 크다. 순수익만 계산한다면 차라리 관정을 파지 말고 내버려두는 것이 이익일 수 있다. 그러나 농부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드려서 관정을 판다.
어쩌면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손해를 보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손익계산을 할 때 결코 하지 말아야 하는 수고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농심은 다르다. 손익계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농심이기 때문이다. 손익계산으로만 생각한다면 차라리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농부의 마음은 순수익에 매이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지금 시들어 죽어가는 생명에 있다. 생명을 기르는 마음이 그런 것일진대 그것이 안타까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 농심인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인지?
한국교회의 모습에서도 때론 손익계산부터 생각함으로 정작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생명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농심도 생명을 생각하며 온밤을 지새워 물을 찾는 일을 하는데, 손익계산이 맞지 않기 때문에 해볼 생각조차 하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면 교회적 사명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계산상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철저하게 계산된 투자만을 생각한다면 교회는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도 논바닥이 갈라진 광경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춰진다. 갈라진 논바닥만큼이나 타들어가는 농심은 죽어가는 생명들을 생각하며 이 밤도 물을 찾아 뜬눈으로 새우건만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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