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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함성과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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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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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는 함성이 고요히 잠든 새벽을 깨운다. 이어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결에 무슨 일인지 놀라서 눈을 떴다. 소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누운 채로 잠시 생각했다. “무슨 소리지?” 이내 정신이 들었다. “아! 올림픽 축구, 동메달 결정전···” 벌떡 일어났다. 골을 넣었다는 소리겠다는 생각에서다. 늦게 잠들었던 터라 잠든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TV를 켜자 눈이 부셨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아직 몸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TV리모트컨트롤을 손에 든 채 몸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아직 전반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팀이 한 골 앞선 채 경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소파에 기대어 전반전을 다 보았다. 경기가 나름 승산이 있게 진행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하면 날이 밝았을 때 할 일에 지장이 많다는 생각에 후반전을 계속 볼 수 없었다. 가뜩이나 한 열흘 더위로 인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터라 몸이 몹시 지친 상태이기에 TV를 계속 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터라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시 아파트를 흔들 만큼 큰 함성에 눈을 떠야 했다. 이번엔 두 차례나 연이어 새벽의 정박을 깨우는 큰 소리였다. 다른 생각없이 벌떡 일어나 다시 TV앞으로 가서 켰다. 이미 또 한 골을 넣은 상태였다. 이번엔 소파에 비스듬이 기댄 채 TV를 보았다. 결국 후반전이 다 끝나고, 선수들 인터뷰까지 다 보아야 했다.
축구가 무엇이기에 새벽잠을 모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인가. 아니 한일전은 왜 다른 경기와 달리 잠을 이루지 못하고 TV 앞에, 광장에, 체육관에, 혹은 음식점에 모여서 잠을 지새우며 응원(?)을 하는 것인가? 사실 응원이라고 하지만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니 한일 축구경기가 국민들의 정서에 주는 영향이 큰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누가 나오라고 해서 광장에 수만 명의 사람이 모일 수 있겠는가. 이 더운 여름에 창문을 다 열어놓고 자는데 새벽시간에 함성을 지르면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경찰에 신고해서 소리치는 사람들 잠잠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도 신고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피곤해서 잠들었던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 TV를 켤망정 신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나름의 공통된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국가라고 하는 단위의 ‘우리’에 대한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느끼고, 허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해서 새벽을 깨우는 소리를 질러도 오히려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 비록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라고 하는 의식 때문에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새벽잠을 깨운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잠을 깨어 TV 앞에 앉아서 기쁨에 동참하기를 원하게 된다.
경기가 끝났다. 다시 잠자리에 들면서 잠시 생각한다. 새벽함성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평소에 모든 이웃과의 관계도 이해와 나눔과 격려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해관계 따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이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국가 단위의 ‘우리’를 체험하게 하는 새벽의 함성처럼 개인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모두가 기쁘고 평화롭지 않겠는가. 모두가 여유롭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분명 새벽에 잠을 깨운 함성은 ‘우리’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소리였다. 누구도 새벽의 함성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굳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도 ‘우리’라는 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이처럼 아름답다. 이해도, 배려도, 그리고 격려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웃에 대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단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우리’라고 하는 의식을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는 이웃이라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가져다주는 행복함보다도 함께하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행복이 더 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웃할 수 있는 ‘우리’가 많은 사회가 된다면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 ‘우리’의 개념이 이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는 결코 기쁨과 행복을 더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로 이웃하는 이들은 경쟁의 대상이며 경계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올림픽 축구가 아닌데 새벽녘에 사람들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댄다면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당장 쫓아나가서 야단을 할 것 아니겠는가? 그만큼 ‘우리’의 의식을 가질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이웃과 함께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제 올림픽이 끝났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함께했던 ‘우리’의 의식이 계속되면 좋겠다. 적어도 이웃과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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