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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의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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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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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부터 내게 주어진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교단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다. 당시 사료를 수집하면서 교단의 35년사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여건에 의해서 진행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20여 년이 흘렀다. 몇 년 전부터 50년사를 정리해야 한다고 헌의하였다. 하지만 그 중요성을 입으로는 말하는데 이 일에 나설 사람들은 없다.
총회에 제안을 한 당사자인 내가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러나 위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의하는 것밖에는 달리 없었다. 모든 진행은 내 몫으로 남겨졌다. 역사를 기술하는 것부터 책을 만드는 일까지···. 그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 한 권의 역사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마지막 교정본을 어젯밤 11시에 송내역에 나가서 직접 받았다. 총회까지 책이 나와야 하기에 다시 한 번 교정을 보고 수정해서 책이 나오게 하려면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늦었더라고 봐야겠다고 요청을 했다. 편집과 출판을 담당하는 한 장로님은 그로 인해서 서울서 한 권의 교정본을 들고 내려왔다. 늦은 시간이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장로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송내역까지만 오시라고 하고 나가서 받아온 것이다.
교정본을 받아든 순간 벅찼다. 아직 완성본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젠 교정만 보면 되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들려질 교단의 역사책을 생각하면서 벅찬 마음이 더위를 잊게 했다. 여름 내 시간만 있으면 밤낮 붙들고 앉아서 씨름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힘든 시간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벼웠다.
늦은 시간 집에 들어서니 몹시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몸이 더 피곤했다. 겨우 옷만 갈아입고 책상에 놓인 우편물을 확인하는 순간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이 지친 몸에 힘을 주었다. 필요한 사료들을 찾기 위해서 여러 모로 뛰어다녔지만 구할 수 없었다. 종이 한 장, 잡지나 신문 한 장까지도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
그런데 낯선 우편물이 와있었다. 역사를 기술하는데 필요한 사료는 아니지만 사진 한 장과 <명예졸업장> 한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비록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찾았던 사료들의 내용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만큼이나 바랐고 낡은 한 장의 종이지만 그 한 장은 많은 것을 내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역사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렇게 한 장의 고문서나 사진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귀한 것은 없다. 역사는 문서를 통해서 보존되며 계승되기 때문에 한 장의 고문서가 주는 가치는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문서에 담긴 역사를 읽지 못하거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한 장의 쓰레기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번에 교단사를 정리하면서 그동안 찾지 못했던 문서들을 다소 수집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것이지만 귀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문서들이다. 언젠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안은 셈이 되는 것이지만 하나씩 내 손에 쥐어질 때 주어지는 기쁨은 배나 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투자의 가치로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맞닥뜨릴 때는 힘이 빠지고,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정작 그것이 필요한 것은 역사가인데 돈이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고서(古書)조차 단지 투자의 가치로만 판단해서 물주(物主)의 손에 들어가고 만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현실일지라도 문서는 연구하는 사람에게 연구의 대상 내지는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소유하는 가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의 가치만 생각하여 물주가 차지하고 만다면 불행한 일이다.
문서를 남긴 것은 인간의 문화유산이다. 때문에 그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단지 어떤 한 사람만의 소유가 되거나 반대로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쓰레기가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무심코 버려지는 것이 되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단지 투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오늘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문서 한 장은 비로소 세상에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역사가 개인의 기쁨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기쁨이 되게 한다. 그래서인가. 그동안 지쳤던 여름날의 힘듦이 한 순간 사라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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