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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을 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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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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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5.>

뉴스의 눈이 기독교의 각 교단 총회가 세습에 대해서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집중되어있다. 특히 일반 언론에서 교회의 세습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렇게 세습에 관심을 가지는가? 일반 언론이나 세인들까지 교회의 세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마디로 ‘돈’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지도자들은 세습을 문제시 하는 논리에 놀아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세습을 제도적으로 금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세습에 대한 문제가 모두 해결 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 결과 이번 총회에서 감리교단은 세습을 금하는 제도를 마련했다고 떠들썩하다. 세습금지법이 가결 될 것인지 무산 될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안되면 기독교가 지탄을 받게 되는 상황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가결됨으로써 안도의 한숨을 쉬는 듯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이러한 세간의 소식을 접하면서 씁쓸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교회가 세습하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돈’이다. 언론의 관심도 세습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돈’에 있다. 부(富)를 세습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세습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같은 말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를 들어서 신자가 1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그리고 전도할 대상도 없는 어느 산간벽지의 작은 교회에 부임할 목회자가 없다고 하자. 그런데 그 교회 목회자 자녀가 기꺼이 세습을 하겠다고 했을 때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세습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할 것인가. 또한 어느 언론이 그 사실을 실어서 세습이 잘못됐노라고 하겠는가.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 경우 오히려 세습은 명예이고 자랑일 수 있다. 오히려 칭찬과 격려를 하게 되지 않을까. 또한 세상은 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제도적으로 세습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기독교 스스로가 올무를 하나 더 만들어 목에 매는 격이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었듯이 그러한 교회에 세습을 했다고 세상의 어떤 언론이 반대하거나 문제를 삼겠는가.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교회가 부(富)를 축척하고, 그것을 분배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교회에 주어진 부는 축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가 부를 축척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또한 분배의 원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부를 자기만족의 도구로만 사용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저항한다. 이러한 선례는 이미 중세기독교가 너무나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중세의 기독교는 부를 교회의 구성원, 특히 성직자들이 독식함으로 문제가 커졌고 종국에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회에 부가 주어지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 가르침에 충실하게 사용한다면 교회를 향해서 세습을 하니 마니 하는 소리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볼 때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서 부를 사용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세습이 문제화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배가 아플 만큼 심하다. 교회와 교회 사이에서도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데 어찌 세상이 교회를 곱게 보겠는가. 그러면서도 곱게 봐주기를 바란다면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세습을 금하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세습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이 역시 착각이다. 법은 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세습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고, 누구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권세가 지배하는 교회를 만들겠다는 고백과 그 말씀에 순종이 없이는 어떤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제도를 만듦으로써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잠시 피하고 보자는 임기응변적인 대처에 불과하다. 즉 법이 만들어지면 반드시 편법이 따라온다. 결코 세습은 아니지만 세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교회는 세습방지법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고 있다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니, 이러한 상황에서도 세습을 해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다니 할 말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한국교회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된다. 그러니 제도적으로 세습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굳이 이해하자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지금 세상은 교회가 세습을 금하겠다고 해서 결코 칭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세습을 제도적으로 금하게 했으니 교회를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어리석다는 말이다. 세상은 교회가 이 법을 만들었기 때문 환영하거나 칭찬하지 않는다. 세상은 교회가 세습을 금하는 제도를 만든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훌륭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옥죄어올 것이다. 세상의 관심은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돈이 많기 때문에 세상이 지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교회에 맡겨진 부를 이웃들, 특별히 경제적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누는 기능을 제대로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결코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검약한 살림과 생활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이웃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세습을 한다고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전통을 잇게 하기 위해서 세습을 하라고 권면할 것이다. 정녕 한국교회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하지만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만족하고 여전히 이웃과 약자들을 살피지 못한다면 이번엔 세습이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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