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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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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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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6.>

인간을 창조하실 때 눈을 주신 것은 특별하고 감사한 일이다. 인간에게 눈이 없었다면 어떤 삶이 가능했을까? 과연 인간이 중심이 되는 문화를 창조하면서, 그것을 누릴 수 있었을까? 인간의 삶의 의미를 더하면서 풍요로움을 느끼고 감격할 수 있을까? 어떤 질문을 해봐도 눈이 없거나 눈의 기능이 완전하지 못했을 때 인간의 삶의 의미는 반감될 것이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물론 눈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살아있는 생명들에게도 눈을 만들어 주셨다. 해서 살아있는 곤충이나 동물들은 시력의 차이는 있지만 일단 모두 눈을 가지고 산다. 다만 인간과 차이가 있다면 동물은 눈을 가지고 사물을 감격하거나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눈은 오직 먹이를 찾는 것과 종족번식을 위해서 짝을 찾는 것, 그리고 생존을 위한 거처를 찾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동물들이 눈을 다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눈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 일수 있는 요소 가운데 이성이라는 기능 다음으로 중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을 통해서 사물을 분별하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문화적 발전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을 인식하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사물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통해서 삶을 풍요롭게 표현하고 만들어 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눈을 가지고 무엇을 보는가, 어디서 보는가, 얼마 큼 보는가에 따라서 생각도, 느낌도, 가치도 다르게 판단한다. 오래전 유명했던 소설 <갈매기의 꿈>이 널리 읽혔던 일이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보기도 했다. 원제가 Jonathan Livingston Seagull이다. 리차드 바흐(Richard Bach)라고 하는 작가의 작품인데 이 글에서 유명하게 남겨진 말이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명제적 경구(警句)이다. 주인공으로 의인화된 갈매기 조나단은 사람들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인간의 안주하려는 생각, 당장 먹을 것을 얻고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생각, 고깃배나 따라다니면서 쉽게 먹이를 얻으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어느 날 높이 날아올라 먼 바다를 향한다. 그리고 다른 갈매기들이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다른 갈매기들은 부러웠다. 하지만 대부분 용기가 없거니와 귀찮아했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주어진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어디서 보는가 하는 것은 판단과 누림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특별히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 때문에 그것에 갇히기 쉽다. 그래서 자신이 본대로만 행동하고 판단하려고 한다. 이때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위치에서 보았는가는 매우 결정인 요인이 된다. 마치 창공을 나는 것이 두려워서 걷기만 하는 갈매기는 바다를 볼 수 없고, 먹이를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죽음에 이르듯이 말이다.

자신의 소유로만 만족하려고 한다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사람에게 허락된 눈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을 때 인간은 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당장 눈앞에 것만 본다면 담 넘어 이웃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서 관계를 통한 누림은 동반되지 않을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이든, 주변에 살면서 삶을 함께하는 사람이든, 그들을 볼 수 있는 눈이라면 좋겠다. 자신이 보는 것만 보라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해도 되고, 나눔도 가능하며, 때로는 힘써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인간의 삶은 이렇게 같이 보고, 나눠보고, 멀리 볼 수 있을 때 아름다움을 이룰 것이다.

한국교회를 향해 지탄하는 소리들이 많이 들린다. 모든 소리가 옳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소리는 결국 자신을 보고, 또한 바로 보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만이 자신을 볼 수 있고, 이웃을 볼 수 있으며, 또 멀리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에 귀를 막는다면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고 결코 멀리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리에 충실하지 못한다. 또한 다른 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한 마리의 갈매기가 높이 날아 멀리 보고 다른 갈매기들에 할 수 있는 말, 그 말을 생각하면서 한국교회는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준비하는 일과 함께 바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해야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 소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안주하려는 본능적 욕구에 매인다면 결코 높이 날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애써 멀리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현재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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