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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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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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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을 살라

발전을 지향하면서 인간이 추구한 가치는 빠름(fast)이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빠르게 하는 것이 가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빠른 것은 현대적인 것이고 느린 것은 옛날 것이라는 등식으로 이해했다. 어느 면에서 틀리지 않는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산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살고, 더 많이 일하고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이 시공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능력과 함께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현대는 빠른 것을 지향하는 가치를 인간의 능력이라고 여겼다. 빠르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고 구시대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마 누구나의 손에 들려있는 전화기가 아닐까. 전화기는 속도경쟁을 하고 있고, 그 기능이 다양해져서 온갖 것을 전화기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름에 익숙해지고, 빠름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해서, 빠르지 않은 것은 퇴물로 여긴다.
전화기와 함께 자동차가 일반화되면서 빠름에 익숙하게 하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자동차 역시 빠름을 부추긴다. 저마다 출력이 좋은 것을 자랑하면서 구매자를 유혹한다. 자동차의 발전도 빠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 일반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동차를 선전하는 전단지나 TV광고를 보면 역동적이면서 그 빠름을 강조한다.
이렇게 빠른 것을 일상에서 느끼면서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빨라야 직성이 풀린다. 먹는 것조차도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니 음식도 빨라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소위 패스트푸드이다. 빠른 만큼 좋으면 좋으련만 음식은 결코 빨라서 좋은 것이 없다.
이를 계기로 해서 슬로푸드를 먹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건강을 위해서는 패스트푸드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패스트푸드가 제공하는 영양소가 슬로푸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타민과 식이섬유와 같은 성분이 절대 부족한 반면에 열량은 높기 때문에 비만의 주범이 된다.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는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비만과 성인병이 많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음을 전제로 생각하면 틀리지 않은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최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트렌드가 ‘느림의 미학’ ‘슬로 트립’ ‘슬로 시티’와 같은 말들이다. 그렇다고 느린 것은 모든 것이 좋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히’라고 하는 말이 더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빠름을 가치로 생각하는 삶의 현장에서 느림을 말하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하다. 그만큼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빠름의 노예가 될 수 있다.
빠르다는 것은 목적을 향한 것일 때 유리하지만 의미를 생각할 때는 불리하다. 빠른 만큼 생각하거나 의미할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느림은 의미화를 위한 배려는 유리한데 목적을 향한 행동에는 부족함이 될 수 있다. 빠른 것에 익숙한 우리의 현실에서 느린 것을 돌아볼 수 있고, 느림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다면 느리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신앙의 성장도 그렇지 않을까? 과정을 거치면서 각각에게 필요한 것들을 깨우치게 되고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갑자기 성장했을 때 동반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빠르게 성장하면 그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문제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나이에 맞게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인격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신앙도 시간이 지남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자신 안에 간직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담아낼 수 있는 신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인격이 하루에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도 한순간에 우리 안에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격이 형성되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수양을 위한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신자 안에 형성되어서 신앙인격으로 나타나기 까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 속성으로 신자가 만들어질 수 없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종교적인 답습을 위한 훈련을 통해서 신자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있지만 온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내는 신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들조차 속성으로 열매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닌지. 오랜 시간, 인고의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신자가 되도록 만드는 수고는 비생산적,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어제 심은 나무에서 오늘 열매를 따려고 하는 모습은 아닌지.
성장경쟁을 하면서 성장해온 한국경제가 많은 문제를 동반하고 있음을 새삼 경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경제성장과 함께 성장하면서 경쟁적인 의식이 교회성장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빠름의 가치 때문에 진정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사는 자들이기에 더 느림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원에 있어서 속도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결코 느림을 열등이나 낙오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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