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성경속세상 분류

우리는 계모가 아닌가?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우리는 계모가 아닌가?

칠곡과 울산에서 일어난 아동사망 사건이 계모의 학대에 의한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분노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아동인권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슷한 아이를 둔 부모들이 나서서 규탄하고 있다. 법정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물론 전문가들까지 합류하여 조직적으로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두 사건 모두 계모가 의붓자식을 학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건이 이어지자 여론이 들끓게 되면서 계모라는 단어가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문제는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계모의 지속적이고 비인간적인 학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각 가정의 사연은 알 수 없으니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보호해야 할 엄마가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학대했다는 것은 아무리 관대하게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면 그 계모들은 왜 의붓자식을 학대해야 했는가? 왜 의붓자식을 그렇게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계모만의 문제인가? 당사자들에게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에 일방적인 비판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약자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들을 상대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행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이들은 죽음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말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 그래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계모 이전에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힘이 약하다는 것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야 했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힘이 없는 아이기 때문에, 혹은 자식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랬다면 그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잘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미 죽은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엄마(계모)였다는 사실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아이를 생각하면 많이 아프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잃었을 때 그 아이가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상실감은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혹여, 안다고 한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죽음에 처한 아이는 다시 새엄마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연이 있든지 일단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를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주가 되었든 결코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배아파서 낳지 않았다고 해서 학대의 대상을 삼는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혈족이 아니라도 이미 한 생명으로 세상에 온 인간을 단지 자신이 낳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자신보다 약하다고 해서 그렇게 학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그 계모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모습일지 모른다. 다만 잠재해 있을 뿐이다. 친자식에게도 비정한 부모들이 있어서 가끔 뉴스가 되곤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니 말이다. 이런 경우는 계모보다 더 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친자식인가 의붓자식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잠재해 있는 악한 본성이다. 그 본성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때 인간다움을 보일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인간이지만 인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계모에 대한 의식들이 좋지 않게 되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사실 이혼과 재혼율이 높아지면서 계모와 계부가 과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계모가 이번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즉 재혼가정을 이룬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더 많이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이라도 이번 사건 때문에 재혼가정에 대한 편견이나 악의적인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뜩이나 스스로 마음을 졸이면서 살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계모’라는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면 또 다른 악이 될 것이다.

지난 주간에 소개된 해외 토픽의 한 사진이 또렷하게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죽은 새끼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어미 하마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영국의 한 작가가 아프리카에서 사진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장면을 담은 것인데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사진이다. 미물의 짐승도 새끼를 잃고 슬퍼할 줄 아는데 인간으로서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일 친자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인간이 다른 것은 의붓자식이든 친자식이든 그 이전에 인간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죽음에 이르도록 학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연 사회적, 경제적, 신체적 약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들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죽음의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과연 또 다른 계모의 모습이 아닌지 깊은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종교적 명령이기 전에 인간됨의 기본을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