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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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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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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과 그와 동급의 공무원을 임명할 경우 청문회를 하는 제도를 도입해서 실시하고 있다. 이 제도로 인해서 과거에는 없었던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총리에 임명을 받고도 자진사퇴를 하는 경우들이다. 사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살면서 재상에 오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기회와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렇게 오르기 힘든 재상이 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그 사람이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현재도 총리 후보도 자진사퇴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다. 아예 대놓고 사퇴하라는 소리도 들려온다. 후보자로 지명을 받았지만 본인도 진퇴양난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당연히 임명권자 또한 갑갑하기는 매한가지가 아닐까?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고른 인물일 것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꼭 필요하고 적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후보자로 내정을 했는데 정작 이런 저런 일들이 밝혀(?)지거나 혹은 소문이 나면서 말이 많다.
갑갑한 마음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안정과 함께 국민들이 신뢰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재상이 돼서 평안한 나라를 만들어주기를 원한다. 또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는데 정작 재상의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은 청문회를 앞두고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지경이니 국민들의 마음도 편할 이가 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은 ‘청문회’라고 하는 제도 때문이다. 청문회란 후보자가 직무에 임했을 때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또한 그 일에 대한 소신과 의식은 어떤 것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한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입장을 듣기 전에 과거 행적에 대해서 먼저 검증을 하게 된다. 누구도 훗날 자신이 재상이나 장관의 자리에 오를 것을 예상하고 이력을 관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초월적인 능력의 소유자 일 것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경우에 지금 하는 일과 말에 대해서 그때를 위해서 계획적으로 완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훗날 사회적 정서가 어떤 것이 될지 모른다. 같은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사회적인 정서나 가치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어떻게 그것까지 알아서 대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현재에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과 일반적인 사회적 가치가 인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에 충실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보편적 가치를 왜곡하거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훗날 청문회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보편적 가치를 왜곡시킨다면 반드시 문제를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을 청문회를 앞두고 시끄러운 나라의 현실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인은 더 궁극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재상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청문회를 받아야 할 날이 온다. 따라서 자신은 재상에 오를 일이 없으니까 청문회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 그리고 부활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인 판결을 받는 날, 모든 사람은 청문회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물을 것이다. “너는 그때 왜 그랬냐?”고.
그날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과거행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변증을 할 것인가? 지금 당장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날에 예수님은 땅에 살았던 모든 인간에 대해서 청문회를 하게 될 것인데 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변증이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변증이 없는 청문회는 누구도 자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변증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전적인 은혜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재상에 오를 일이 없으니 자신과 청문회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청문회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청문회를 비켜가거나 스스로 통과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 청문회는 일생의 여정을 남김없이 검증하게 될 것인데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임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청문회에 대해서 의식이 없다. 아니,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지 모른다. 당장 어려운 문제가 없다면 애서 무심결에 지나치게 하는지 모른다. 자신은 재상이 될 일이 없으니 신경조차 쓰지 않고 행동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인간은 그 앞에서 최종적인 청문회를 거치게 될 것인데 그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 결코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때문에 현재를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창조질서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로 살 뿐이다. 그 날의 긍휼을 소망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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