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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1903, 평양 1907, (인천) 마리산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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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관철 목사 “원산 1903, 평양 1907, (인천) 마리산1915”
마리산 성령 운동 100주년에 마리산을 감리교회의 성지로 선포해야

1. 원산 하디 회개운동의 발전 과정 회고

1907년 평양부흥 운동은 본래 사경회 운동이었고,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 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 부흥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장로교 지도부는 감리교 교역자가 평양대부흥 운동 100주년 기념준비위원회에 초대하지도 않는 등 감리교를 배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2004년 당시 우리 감리교회는 아직 19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 중부연회 감독으로 피선된 이규학 목사는 감독으로 피선된 2004년 12월 양평에서 중부연회 정책협의회를 개최하였고, 이 때 영적 대 각성 위원회를 연회 내에 설치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100주년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규학 감독을 중심으로 연구모임이 진행되면서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대한 올바른 가치가 밝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규학 감독은 장로교에서 집중하였던 1907년 평양 이전에 “1903년 원산의 하디 회개 운동”을 새로 부각시키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지도부가 20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기념할 때, 우리 감리교 지도부는 뒷북을 치며 하디 원산 회개운동의 100주년이 되는 2003년도가 아닌 101년째인 2004년도가 되어서야 “1903 원산 하디 회개 운동”을 기념한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보고 있는가, 혹은 너무 과거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우리는 지헤롭게 천국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질문하며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2. 회개의 방향을 분명히: 1900년대의 회개방향과 2000년대의 회개 방향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1903년 당시 시대적 암울한 상황 속에 양심을 거스리며 살던 조선민중에게나 교만했던 서양 선교사에게 있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당시 조선땅과 조선민중을 “회개의 바다”로 이끈 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에 틀립 없다. 이것은 죄로부터의 회개며, 성서가치로 표현한다면 아마 “요한의 세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100년이 지난 2000년대에도 죄로부터의 회개를 계속 부르짖는다면, 이것은 신앙의 본질적 구성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시대에 뒤쳐진 모습이지 않을까 한다. 1903년의 세계는 어둠과 억압의 세계였다면, 현재의 세계는 빛과 자유의 세계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회개 즉 방향전환은 “죄로부터의 회개”만이 아니라, “천국을 향한 방향전환”, “법치와 질서를 향한 방향전환”, “거룩한 시온산을 향한 방향전환”이어야 하리라 본다.

3. 올바른 역사이해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음으로 감리교회의 미래를 밝게 열자

원산과 평양 성령운동과 더불어 한국의 삼대 영성 운동으로 여겨지는 마리산 성령 운동은 1915년에 시작되어 일제시대를 통해 해방 후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강화 남쪽 마리산에 그 영성운동을 담은 기도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마리산의 영성 운동의 씨앗을 살피면, 독립 운동가 이동휘씨가 등장한다. 그는 구한말 조선의 무장이었다. 그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체 후 강화 지역에 독립 운동의 불길을 지피고자 교회설립과 학교설립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강화에 약 70여개의 학교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강화 뿐 아니라 장봉도까지 건너가 당시 지역 유지에게 학교와 교회를 세우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여기서 “열정과 애국의 사람” 이동휘를 발견한다. 그는 감리교 권사였다. 그의 열정은 강화를 넘어 주변 섬까지 찾아다니며 새로운 영성의 씨를 뿌렸고, 나라사랑의 기도를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의 씨앗은 여려 교회에 새벽기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강화의 변방 장봉도 옹암교회의 새벽기도 는 큰 성령체험 부흥회로 발전되었다. 이들 장봉교인들은 은혜를 체험한 후에 조금이라도 더 하늘로 가까이 가기를 원했으며, 결국 그 열정은 그들로 하여금 장봉과 강화 사이의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며(홍해건넘), 마침내 민족의 기도터 마리산 참성대에 올라가 기도를 하게 하였다(시내산도착). 이로서 강화 감리교회의 기도는 한민족의 기도터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해방을 위한 기도와 조국통일을 위한 기도가 마리산을 울린다.
한때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인의 영성을 말살시키고자 참성단의 돌제단을 무너트렸다. 이 때 강화교인들은 매년 부흥회의 마지막 날 마리산 정상을 향해 기도드리러 올라갈 때, “믿음의 돌”을 이고 갔으며, 이것으로 제단을 다시 쌓았다. 이로서 강화교회는 민족혼의 수호자로 선다. 이 운동의 가장 멋있는 열매는 1915년과 1919년 삼일운동의 상관관계에서 찾아진다. 강화 삼일 운동의 주역들이 누구인가? 이들 대부분은 마리산 부흥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분들이다. 개인의 영성체험이 민족해방이라는 사회적 영성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영성은 조국통일과 세계선교라는 마리산 위에 세워졌던 성모관의 두 기둥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아름다운 영성역사의 장소가 대한민국 어느 곳에 발견될 수 있을까? 태백산보다, 한라산보다, 백두산보다 작지만 더 중요한 영성의 산이 마리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산이며 계시의 산이며, 하늘의 산이다. 마리산은 감리교회의 성지다.
아마도 내년 아펜젤러 130주년 기념사업은 1903년 원산 하디 회개 운동과 1907년 평양 사경회 운동과 그리고1915년 마리산 성령체험 운동이 함께 종합되는 축복의 해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성공될 때 종교개혁 500주년(2017)과 삼일운동 100주년(2019)의 미래가 우리 한국감리교회에 밝게 열리게 될 것이다.

( 하관철 목사 문산교회, 강화 남지방 마리산 부흥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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