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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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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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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언약에 근거를 둔 믿음으로…

 

지금까지 기독교는 믿음이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 믿음이 근본적으로 무엇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설명한다. 창조론이 속하는 신론에서 출발한 믿음을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는 소유하여야 한다.

성경적인 신론(神論)만이 인류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함을 잘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에 근거를 둔 믿음만이 구원의 목적이 무엇임을 잘 알려준다. 이 믿음이 기독교를 다른 이방 종교들과 구분 내지 구별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믿음을 상실한다면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극이며 불행일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창3장)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었다. 창조를 통해 부여 받은 신분을 상실했다. 인류 사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자기를 위해 문화 사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자 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사이 심각한 괴리(乖離)가 생겼다. 아니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실패한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인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창조 목적은 반드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약속한 이유였다(창3:15절). 이 최초의 약속을 원복음과 구속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구속 언약이 약속하는 구원은 인류의 구원 자체만을 목적하지 않는다.

구원의 은총을 통해 죄인을 다시 의인으로 세워 문화 사명(창1:28절)을 하나님의 본래 목적대로 다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구원을 약속하는 원복음 또는 구속 언약은 절대로 문화 사명(창1:28절) 또는 창조 언약과 무관하지 않다. 원 복음을 통해 표현된 구속 언약(창3:15절)은 문화 사명과 관련된 창조 언약(창2:17절)과 깊이 관련된다.

이렇게 구속 언약은 창조 언약을 위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는 반드시 창조 언약의 신학적 의미와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이 때 성경적인 구원론이 바르게 정립된다. 믿음의 선진들 중 아벨과 에녹의 믿음이 이를 잘 증명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절) 아벨은 제사로 인해 의인(義人)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는 타락 사건 이후 최초의 의인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제사는 그의 내적 믿음의 외적 표현이었다. 가인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은 것은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믿음의 결여 때문이었다. 그럼 어떤 믿음을 뜻하는가?

이 당시 이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또는 계시란 창조 기사와 타락 사건이었다. 자세히 본다면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이었다. 창조 기사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하나님이 이 세상과 만물을 창조했는지 알려주며 구속 언약은 타락 사건을 통해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메시아를 믿게 만듭니다.

이 두 언약의 신학적인 가르침과 내용을 믿느냐 여부가 제사에서 아주 중요했다. 믿음이 가인에겐 없었고 아벨에겐 있었다. 어릴 때부터 창조 언약과 구속 언약이 구두(口頭)로 이들에게 동일하게 전해졌지만 가인은 전혀 믿지 않았고 아벨은 진심으로 믿었다. 믿음 없이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나 바른 믿음에 따라 밖으로 나타난 순종이 외식적인 제사보다 훨씬 낫다. 믿음 없이 드려진 예물과 제사는 아무리 기름져도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이 믿음은 두 결과를 초래했다. 믿음의 제사로 아벨은 의인이 되었고 가인은 악인이 되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은 앞으로 올 메시아의 혈통에 속하게 되었지만 형 가인은 제외되었다.

결과적으로 성경적인 창조론(창1-2장)과 기독론(창3:15절) 또는 창조 언약(창2:17절)과 구속 언약(창3:15절)에 기반을 둔 믿음만이 구원론과 예배학의 내용과 의미를 바르게 세워준다. 그렇다면 창조론이 속하는 신론(神論)과 기독론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이라면 구원론과 예배학이나 목회학은 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유감스럽지만 기독교 교회는 원인보다 결과에 지나치게 집중한다. 소프트웨어를 무시하고 하드웨어만 중요하게 본다. 그 결과 한국 교회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교회 성장을 자랑하지만 한국 목회자들은 늘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목회를 배우려 한다. 기초과학이 약하여 원천 지식을 늘 미국에서 비싼 로얄티를 지불하듯이 말이다. 성경적인 신론과 인간론 그리고 기독론에 대한 기초적인 신학 지식을 무시하기에 생긴 결과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 교회는 내용을 무시하고 형식에만 집중하게 된다. 서서히 한국의 기독교가 외식적이며 외형적으로 변하는 이유이다. 구원론, 예배학과 목회학을 다시 정립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창세기 1-2장의 신학을 무시한 결과는 참으로 어이없는 결과를 기독교에 불러들였다. 다시 말해 타락론(창3장)에 근거한 구원론을 정립한 결과이다.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절) 아벨과 달리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이것도 믿음으로 산 결과였다. 히브리서는 덧붙여 이렇게 증언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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