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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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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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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4.>

메카유감

 

사우디의 메카에서 전해진 비보를 접했다. 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압사(壓死)를 당했다는 것이다. 메카 외곽에 있는 ‘마귀 돌기둥’에 돌을 던지는 의식을 위해서 200만여 명의 이슬람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저마다 돌을 던지기 위해서 돌기둥을 향해서 앞으로 다가서기를 원했다. 앞에 있던 사람들은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압사를 당한 것이다. 소식에 의하면 717명이 죽었고, 863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 중에 중상자가 있어서 사망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압사사건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매년 반복되는 참사다. 사망자가 몇 명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해마다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견된 것이고 방지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그럼에도 사고를 막을 수 없는 것일까? 문제는 정해진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져야 한다는 절박한 종교적 열망을 제한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시에 몰려드는 200만여 명, 게다가 정해진 시간에 순례를 끝내야 하니 다른 묘책이 없다. 그러니 해마다 반복되는 참사를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여기에 생각할 것들이 있다. 첫 번째가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한계다. 정해진 시간에 순례를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생에 한 번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은 신앙을 전제한 순례임에도 자신들의 목적이 우선할 수밖에 없게 한다. 때문에 오직 돌기둥을 향해서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이번과 같은 참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그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부정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결코 반복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율법에 매이는 신앙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교훈을 확인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율법주의 신앙은 종교적 수단으로서는 유용하며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 결과는 요즘 세계적으로 공포를 조성하는 IS와 탈레반 등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교도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자폭테러와 공공장소에서의 테러사건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의 이름으로 율법을 문자적으로 강요할 때 기꺼이 자폭테러를 자원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쟁취하겠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들의 모습에서 이율배반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모습은 기독교 신앙도 율법주의를 추구할 때 같은 결과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성지(聖地)는 없다는 것이다. 보통명사로 성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성지는 없다. 그럼에도 종교적인 의미에서 성지를 만들게 되면 이번과 같은 사건은 기독교에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독교가 로마교회로 대변되던 시대에 같은 오류를 범했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교훈한다. 소위 성지를 탈환한다는 이유로 십자군 전쟁을 한 것이다. 또한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것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행한 전쟁이다. 당시 사람들의 희생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요했다.

그러나 그곳이 진정 성지인가? 분명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성지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고 영원히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성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성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직접적 관계를 단절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의식이나 정해진 장소에 매이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성지, 성자, 성물과 같은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장소와 도구가 성스럽거나 어떤 영적인 효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도구와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 신앙의 역사와 전통에서는 어떤 형태의 성지나 성물, 성자도 배격했으며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쟁취한 것은 로마교회가 그 중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로마교회의 신앙을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규탄했으며 대신 그러한 것들을 신앙의 중심에서 배제시키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쯔빙글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로마교회의 신부이지만 성경이 보증하지 않는 성자나 성물숭배신앙을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이 주임신부로 있던 취리히교회 예배당에서 이러한 것들을 제거하는 것부터 개혁을 했다. 당시에 제거한 성상과 성물들은 지금도 취리히예배당 지하에 있는데 그곳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은 예배당은 건성이고 지하에 내려가서 성상들 앞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그것은 성지, 성자(성상), 성물과 같은 것들을 만들었을 때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게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로 전락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열정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대부분의 종교는 그들의 성지를 갖고 있다. 가시적인 장소나 상징적인 물건이 있게 되면 그것을 향한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종교 심리학적인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의 필수 요소이다. 그렇다고 기독교도 성지나 성상, 성물을 만들어 그 충족감을 보장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기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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