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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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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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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이산가족

 

처음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졌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기 가족을 만난 것처럼 감격하며 함께 울었다. 한 장면, 한 마디가 모두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꾸며진 행색이든 아니든 그건 개의할 것이 아니었다. 혈육지간에 생사도 모른 채 수십 년을 헤어져 살다가 생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감격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제한하거나 강제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듯이 정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장면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지지 못했다. 몇 년만인가? 오랜만에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져서 그 소식이 전해졌다. 이산가족문제에 대해서 소원해진 것 같아서 어떨까 걱정(?)했는데 감동은 여전했다. 고령이 된 이산가족들이 마지막 기회로 알아 애타게 찾던 가족을 만났을 때 그들의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저마다 살아온 날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조차 어려운 짧은 시간과 주어진 환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안타깝게 한다. 그마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 채 헤어져야 하는 것은 만난 기쁨마저 더 큰 아픔으로 남겨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전쟁이라고 하는 씻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오갈 수조차 없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의 아픔과 함께 그들의 마음에 남겨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이제라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허락되지 않는다. 60년도 넘게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살았다.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성사된 후 살아있음을 확인한 다음 허락된 만남은 단 몇 시간에 불과하다. 그것도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모르지만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을 주고받는지 까지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 평생에 맺힌 한을 풀 수 있을까?

혼자서는 걷는 것조차 어려운 고령의 노인들이다 보니 의료진이 동행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휠체어로 움직여야 하는 장면도 보인다. 평생의 한이 되었기에 꼭 만나보겠다는 의지가 거동이 불편한 것쯤은 장애가 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성사된 만남은 짧은 시간뿐이다. 60년도 넘어서 만난 혈육이지만 한풀이도 못한 채 다시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했다. 당사자들이 모두 고령이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들이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당사자들에게 약속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건강해서 한 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는 날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한 현실이다. 아직까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6만 명에 가깝다. 그들이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한 번 만남을 허락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다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 번의 면회 때 만남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불과 100여 명이니 언제 다시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회가 거듭할수록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당사자들만의 문제인 것처럼 관심도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상잔의 아픔이 남겨준 고통이지만 정작 그 아픔은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것으로 그들만 아파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들 중에 전쟁을 원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주역들은 없다. 그들은 그냥 평범한 백성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쳤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결코 원하지 않는 헤어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픔은 6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어도 그들만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이산의 아픔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현재 그 아픔은 그들만의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을 보면 아프다. 당사자들만의 문제로 여긴다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웃을 모르는 척 하는 것이며 최소한 함께하는 이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책임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 해서인가? 상봉단의 모습도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결혼한지 6개월 만에 생이별한 한 노부부의 만남이 특별했다. 남쪽에 살고 있는 부인의 표정은 말로써 표현이 불가능하다. 유복자를 낳아서 평생을 살면서 남편이 사용하던 물건을 보관했다는 노인의 표정은 차라리 무상(無相)한 것이었다. 오열도 웃음도 없는 노인의 무상한 표정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아프게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족이 생이별한 상태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종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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