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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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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15

 

둘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다

요 4:46-54

 

사마리아 추수 후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그때 고향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광경을 필립스 역본(J.B.Phillips)에서는 ‘두 팔 벌려’ 즉,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고 표현했다(45절). 환영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이다(35절). 모리스는 절기 때 습관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갈릴리 사람들 중 일부가 성전 청결 사건(2:13-25)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주석했다. 물론 이 기사는 의외로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4절)는 말씀에 이어서 소개되지만 문맥을 보면 그 환영이 최상의 예우이기는 하나 마땅히 드리는 존귀(尊貴)는 아니었다는 흐름이다.

이제 요한은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Cana)에 다시 가셨을 때 32km쯤 떨어진 가버나움(Capernaum)의 중병으로 거의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원격조정(Remote Control)하여 고치신 두 번째 표적이야기를 소개한다. 학자들 중에는 백부장 하인의 병을 고쳐주신 기사의 수정판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원격조정으로 치유하신 것 외에 관계인물(백부장과 헤롯의 신하), 환자의 신분(종과 아들), 예수님의 위치(가버나움과 가나), 예수님의 반응(칭찬과 책망), 관계인의 요청(직접 방문 사양과 간청), 환자의 병(중풍병과 열병), 간청자(장로들과 아버지)의 차이 등을 볼 때 별개의 사건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헤롯대제(Herod)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신하라면 소위 고위관리, 즉 상류층 인사이다.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신분,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상황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A drowning man will catch of a straw)는 심정으로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혹평해도 상관없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 그래서 간절한 기대감으로 80리 길을 달려 예수께 나아왔다. 언제나 솔루션은 예수! 베리 굿 초이스였다.

“내려오셔서 죽기 전에 고쳐주소서”(47절 Come and heal my son), 신하는 간청했다. J.R.힐은 여기서 ‘청하되’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반복되는 행위를 가리키는 시제로 쓰였다고 했다. 고지(高地)인 가나에서 호반(湖畔)인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시라고 계속 간청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지적하셨다. 더 많은 기적만 잔뜩 기대하는 갈릴리 사람들도 포함한 지적이나 신하의 마음을 떠보려는 책망일 수도 있다. 신하는 섭섭하지 않았다. 무례를 범한 쪽은 오히려 자신이다. 감히 예수께 고치는 방법과 능력, 시간을 제한한 셈이다. 체면을 구긴 건 사실이나 다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매달렸다. 그의 수준에서는 이게 최고의 신앙자세였을 것이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예수님은 예상외의 답을 주셨다. 메시아다운 표적이다. 80리 밖의 일을 원격조정하신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 ‘살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50, 51, 53절). 예수 안에 생명 있고, 예수님은 그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先) 순종, 후(後) 체험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한 마디에 신하가 믿고 갔을 뿐만 아니라 고침 받은 시간이 ‘어제 7시’면 오후 1시인데 다음날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다른 볼 일 다 보고 간 셈이다. 믿어도 너무 믿은 것, 놀라운 영적 발돋움(reaching out)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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