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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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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21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요6:25-71

 

“어휴, 좀 알리고 가시지. 빨리 따라 잡아야 해. 저 양반 놓치면 우리는 굶어죽어.” 예수께서 배 타고 가던 제자들과 수상보행(水上步行)으로 합류하여 가버나움으로 가실 때 예수님을 찾던 무리들도 배 타고 가버나움까지 갔다(24절). 보통 열심이 아니다. 하지만 돋보이는 열심이기는 해도 그들의 열심이 표적의 목적인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절)이라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들의 열심을 기복신앙, 그저 또 떡이나 얻어먹고 허기나 채우려는 심보로 보셨다는 것이다.

무리의 기대는 옛날 모세 때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일에 비견할만한 이적이었다. 그들은 모세가 40년이나 만나를 먹인 것에 비해 예수님은 그저 한 번 이적을 행했을 뿐이고, 모세가 전(全) 민족을 만나로 먹인 것에 비하면 예수님은 고작 5천명에게 떡을 분배한 것에 불과하며, 모세가 ‘하늘에서 내린 떡’을 제공한 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인 떡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했다.

이렇게 자신의 진면목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메시야가 오면 저들에게 다시 한 번 만나를 내려 줄 것이라는 자기들의 고정된 메시아관에 맞춘 기대감만으로 찾아온 무리에게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얻어야 한다고 하셨다(27절).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만나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며, 오히려 먹어도 또 배고프게 되어 매일 먹어야 하는 일용할 양식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보내신 또 다른 떡은 한 번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 떡’이라고 하셨다(32-33절).

또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라고 했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처럼 무리가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 무슨 떡인지는 모르겠지만 좌우간 떡을 달라고 요청할 때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35절)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나는…이다”(“I am” saying)의 형식을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예수의 자기 선언에서 가시덤불에서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본다”는 캠벨 몰간(G. C. Morgan)의 생각을 각주로 덧붙이며, “지극히 엄숙한 신성의 표시”라 했다. 공관복음의 간접 화법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7회에 걸쳐 예수님의 직접 화법을 통한 자기선언이 나오는데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이 선언이 그 첫 번째 선언이 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구약의 만나가 상징하던 바로 그 분, 곧 ‘생명의 떡’이시라는 점이다. 그저 광야의 이스라엘이나 가버나움까지 찾아왔던 무리와 똑 같은 수준의 신앙이어서는 곤란하다. 먹고 싶은 때 먹는 간식 수준의 떡으로 아는 신앙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니다. 떡이 당시 유대인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빵, 그들의 주식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인 존재가 아닌 ‘생명의 떡’, ‘내 인생의 절대 필수’(absolute necessity)이셔야 한다. 비록 당시 많은 제자들은 떠나갔지만 “장차 하나님의 생명에 흠뻑 젖어들고 채워지는 그 순간까지 그 분의 생명으로 늘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바클레이(W. Barclay)의 말대로 우리는 성찬예식과 생활경험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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