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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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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변하여...

 

대한민국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다른 삶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고, 똑같은 삶의 현장에서, 똑같은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삶의 현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을 살아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직장에서의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재정의 어려움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모두 똑같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무서운 것을 보며 무섭고, 위험이 다가오면 두렵습니다. 주일 지키고 기도한다고 더 빨리 승진하는 것도,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아닙니다. 거의 똑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다릅니까? 그 어려움과 두려움을 대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어려움이 다가오면, 좌절합니다. 낙심합니다. 두려움이 다가오면 낙담합니다. 도망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순간적으로 똑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금세 이렇게 찬양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다가오면, 기도합니다. 또한 두려움이 다가오면, 더 주님을 붙잡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임마누엘과 여호와이레의 언약으로 지금의 두려움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동굴이 아니요, 결국 빠져 나오게 될 터널임을 믿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생항해 중 그런 언약의 무지개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임을 절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삶의 방식인 줄 믿습니다.

이 세상, 참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들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들 위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찌 보면 절호의 찬스인지도 모릅니다. 똑같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고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래서 어떤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고백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과 동일한 한숨과 푸념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움과 두려움이 다가와도, 그것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을 보여줍시다. 그것이야 말로 이 시대의 전도요, 하나님나라를 사는 방식인 줄 믿습니다. 그런 삶의 고백과 언행의 초심과 열심, 그리고 뒷심이 여일한 은총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이 개혁을 논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한숨과 두려움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일 정도로 목숨 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혹 그들이 죽임을 당하며, 피신을 하며, 오늘 밤 이렇게 잠들면 내일 아침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현실 속에서도 그렇게 담대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그들은 소위 “예수 마니아”요, “말씀 마니아”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오직 예수, 더욱 예수, 결국 절대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지금 당하고 있는 힘든 현실을 이기고 그 분께 최종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삶의 방식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궂은 날씨지만 낮은 구름이 있으면 더 좋은 사진이 나오는 원리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 삶의 현장에서의 종교개혁이요, 동시에 우리가 함께 이런 찬양을 부르며 그 종교개혁자들의 뒤를 능력 있게 따라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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