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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적대각성 운동의 사회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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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영적대각성 운동의 사회학 1

 

재한선교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서구 중심적 문명관과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근대 문명의 정도를 나누어 서구의 것을 가장 높은 문명으로 규정했고, 그 다음은 ‘반개화’, ‘미개화’, 그리고 가장 낮은 단계를 ‘야만으로 설정했다. 한국을 반개화의 국가로 보았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이 우상숭배와 미신, 게으름, 노동 의욕의 부재, 부패의 문제 등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의료나 교육 등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당시, 소위 근대문명 국가들은 우월한 인간, 우월한 국가, 우월한 인종을 만들기 위해 인종간의 투쟁이 불가피하며, 자연도태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개신교 선교사들 중 이런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한국인들 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은, 이러한 사회진화론적 논리와 주장, 그러한 인식을 거절했고 극복하도록 했다. 1907년의 한 중심이 있었던, 평양의 감리교 선교사 무어(John. Z. Moore)는 평양에 나타난 부흥운동 모습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도 은연중 ‘서양은 서양이고 동양은 동양이다.’는 식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근거나, 둘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한국인들은 서양인들이 하는 그런 종교 체험은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부흥회를 통해 서양인과 한국인이 한 형제이며 하나라는 점을 배웠고, 단순하면서도 어린 아이 같은 순진한 신앙이 풍부할 뿐 아니라 깊이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 서양인들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이런 것을 배우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후일, 손정도 목사를 키웠던 무어는, 원산의 하디 (Robert A. Hardie)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움직이는 유일한 주재자는 야웨라는 것, 그 분 아래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는 단순한 신앙 형태가 오히려 깊은 신앙이라는 것, 외형적인 힘과 모습이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오히려 한국인들의 신앙을 서양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1907년이 선교사들의 우월의식과 잘못된 시대정신을 교정시켰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할 때 신앙이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묘했던 것은, 회심 체험을 한 이후, 무지랭이 교인들의 생활 태도는 서구의 어떤 사람들 못지않게 엄격한 기준을 갖게 되었다. 성령 임재의 목격과 강력한 회심 체험이 한 순간에 한국 기독교인들을 바꾸어 놓았다. 우상숭배와 미신, 게으름, 노동 의욕의 부재, 부패의 문제 등이 말끔히 고쳐놓았고, 이들 한국 주변부 사람들을 한국 근대의 주역으로 올려놓았다. 영적 회심 체험의 결과가 교육이나 의료선교의 업적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김명구 박사(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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