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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사회학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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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사회학 II

 

일본의 근대 이데올로기는 천황이 일본 민족의 가부장인 동시에 군주이며 일본의 신민은 이 가부장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천황에 대해 무조건 충효심을 나타내야 했고, 그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애국한다는 것은 천황에 대해 충성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최고의 미덕과 선(善)은 변치 않는 충성이었다.

 

1880년대 후반부터 일본 메이지 정부는 천황제 절대주의를 체계적으로 확립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와 1890년 ‘교육칙어’의 발포를 통해 자유민권운동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를 주도했던 이토오 히로부미는 천황을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천황을 국가의 중심이 되도록 했고, 모든 것을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귀결시켰다. 천황은 일본의 혼(魂)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천황을 위해서 존재해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본은 다음 해 8월에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그 칙령(勅令)은 한국 사람들을 “충성된 국민으로 육성”하기 위해, “보통의 지식”을 시대 상황에 맞추어 가르치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일본의 ‘황도정신(皇道精神)’을 익히게 해서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7년의 신학은 애초부터 일본의 천황과 근대 이데올로기를 거절하게 되어 있다. 야웨 하나님이외에는 절대자를 인정할 수 없었고,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역사의 구원자이며 심판자라는 확고한 신념만이 있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곧 신부적(神賦的) 인간관도 새겨져 있었다. 힘을 믿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침략․약탈한다면 이는 하나님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라 믿었다. 적나라하게 성령의 체험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바뀔 수 없었다.

 

오늘 날에도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에도 무서워서 도망쳐 숨는 자가 많은 한국인 중에서, 이들 기독교 신도들은 조금도 당황하는 기생이 없이, 태연히 자기 할 일을 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독자들은 어른 아이가 모두, 보통 한국인과 달리, 경건하고 총명하여 상륙 이래로 비로소 존경할 수 있는 한국인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1904년, 일본의 한 기독자는 서북지방을 여행하고 나서 이런 글을 게재했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일본의 침탈에 겁먹고 있을 때, 그는 초월적 주재자(主宰者)를 믿고 신봉하는 기독자의 당당한 태도를 목격한 것이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성령 임재의 신앙을 획득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영적대각성의 전통아래에서, 한국교회는 일본의 천황에 냉담했고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천황제 지배이데올로기’를 거절했다. 의도적이기보다는 자동적인 태도였다. 그런 이유로, 오직 신앙의 영역만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1907년의 교회는 가장 저항적 기관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민족교회로 각인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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