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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정치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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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연세대

 

1907년의 정치학 2

 

 

1907년 영적대각성의 결실을 확인하고 싶어 적지 않은 인물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이들은 평양에서 5-6천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했다.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사도적(使徒的) 기독교가 되살아났다며 흥분했고 한국이 아시아의 “지배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이들 중에는 교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언론계와 경제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 거대신문의 특파원들이 한국을 찾았고, 세계 명사들의 방문도 넘쳤다. 이들은 영적대각성 운동의 결과와 선교의 결실, 곧 복음의 강력한 힘을 확인하고 싶어 국권이 상실된 나라를 찾은 것이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1907년 운동의 결실만큼 뛰어난 선교 결과를 가져온 예가 없었고, 그것은 곧바로 미국교회의 업적과 자랑이 되었다.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던 시대였고 문명국과 비문명국의 간극을 뚜렷이 구분하던 시대였다. 사회진화론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었고, 국제정치는 냉철하기만 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식민지에서의 불합리한 일들이란 흔한 일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한국을 억압해도 이 문제가 주목을 끌 수 없었고, 기독교에 관한 일 지라도 다른 기독교 국가 정부의 관심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1912년에 이르러, 미국 정부의 입장이 변하고 있었다. 일본이 억지로 꾸민, ‘105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국의 교계 지도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1912년 10월 11일 뉴욕의 ‘알딘클럽’(The Aldine Club)에서, 미국 남북 장로교와 남북감리교 선교국 총무들, 미국 성서공회와 YMCA 국제위원회 이사단, 전 국무장관 포스터(John W. Foster, 32대), 전 뉴욕시장 로우(Seth Low), 전 하버드 대학 총장 엘리오트(Charles William Eliot), 예일대학교 총장 해들리(Arthur Twining Hadley), 뉴욕의 아웃룩(the Outlook) 사장 아보트(Lyman Abbott) 등이 한국교회의 핍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 헤이그 평화회의의 미국 국제법 고문, 뉴욕대학의 정치 경제학 교수 등 정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 등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모여 '105인 사건'을 심도 있게 토의했던 것이다.

이들은 14개 항에 걸친 권고문(recommendations)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리고 일본정부와 직접 교섭해서, 이 문제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공평히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소극적이고 수세적이었던 미국교회가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한국문제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인들과 한국교회를 학대하는 정황을 비밀리에 미국교회에 전했고, 이에 분노한 미국교회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직접 호소하고 설득하고 나섰다.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한국문제가, 미국교회를 통해, 미국사회와 미국정계의 이슈가 되었다. 이후,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었던 미국 정부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고, 1942년의 ‘카이로 선언’으로 연결되었다. 1907년이 한국독립의 단초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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