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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과 기독교 패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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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태화 교수 안양대

남북정상회담과 기독교 패씽(?)

 

추태화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현대에 와서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구한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희구하던 자주 주권국가, 항구적 평화와 안정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 “역사는 과정이다” 말하지만 주권국가로서, 항구평화 정착의 면에서 지금도 그 도상에 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선조들이 자주 독립을 부르짖던 구한말 개화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시점에 아직도 그 구호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의 존재와 책무를 되묻게 한다. 역사적 대업을 앞에 두고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일은 해왔던 것일까! 혹 정치는 정작 해야할 책무는 뒤로 한 채 정파싸움에 민족의 저력을 허비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것은 명백히 정치의 직무유기이며, 민족 앞에 대역죄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지 않겠는가. 현재도 그런 피해, 적폐가 해소되지 않고 있으니 당면과제는 의심할 바 없다.

우리는 세계 평화, 동북아 평화에 이바지 한다는 말에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정작 남북의 평화공존 면에서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남북 대치상황은 정권 유지를 위해 적절히(?) 활용되었고, 이데올로기, 색깔논쟁은 현재도 정계를 달구고 있는 단골메뉴가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남북정상회담은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크다고 말하기에는 표현이 부족하다. 2018년 4월 27일(금) 개최되는 남북정상회담은 평화통일의 물꼬를 열 수 있는 역사적 대전환점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 아니 대회전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대가 충만해진다.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는 한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자주 주권국가로서 일어서는데 기독교는 헌신을 다해왔다. 개화기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정신을 계몽, 계도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온 심혈을 다 기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음정신이 살아있었고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교회사회학은 지적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 리더십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세속화가 진행되더니 급기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사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릿돌 되시는 교회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일들이 등장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해 헌신하다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고 고백했으나, 현재 한국 기독교계는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해 사회리더십과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

집안 단속하기에도 분주한 상황에서 정치, 사회, 통일 문제에 무슨 발언권이 있겠는가. “너나 잘해”라는 질책이 부끄러운데 역사적 대업이 진행되는 이 장엄한 순간에 무슨 체면으로 나설 수 있겠는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신랑 맞을 등불을 준비해야 하는데, 현재 우리는 어떤가. 미련한 처녀들처럼 등불은 고사하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기독교 패씽”이 될까 두렵다. “당신들끼리 잘 노세요.” 왕따가 될 수는 없다.

조선 땅에 복음이 전파된 개화기 선교기, 그때부터 지금까지 책임있는 행동을 해 온 기독교가 제자리를 찾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사회가 염려하는 기독교가 아닌, 예전의 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정신으로 앞서 나갔던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 사회를 부둥켜 끌어안아야 한다. 상처입은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 원한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예수품에서 치유받게 해야한다. 이 상황을 외면한다면 기독교 패씽의 후회가 따를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심장으로 돌아가야 기독교 패씽을 극복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기독교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동안 한국사에 소중한 역할을 감당해온 기독교가 역사적 전환점에서 패씽되는 일이 없도록 치열하게 돌아보며 행동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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