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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와 6.25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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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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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연세대

기독교회와 6.25전쟁 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242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남으로 쳐 내려왔다. 한국군은 공격해 오는 인민군에게 밀려 속절없이 후퇴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북한군이 침공해 온 것을 간단히 전했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 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했다. 38선이 무너진 한 참 뒤에야 인민군의 전면적인 남침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이다.

 

1950년의 6.25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기독교회였다. 북한 점령 하의 남한에서는 군경 및 기독교인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있었다. 그 짧은 점령기간 동안, 일제 35년 동안에 희생된 기독교인 총수보다 더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고 처형되었으며 실종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북한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북한 땅에 남아 있던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북한정권은 미제의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기독교를 말살했다. 1959년경이 되면 북한에서 실질적 기독교회는 단 한 곳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서울시민 144만 6천여 명 가운데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을 빠져나간 사람은 40만 명이었다. 그 가운데 80%가 월남 동포였다. 북한 땅에서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실체를 경험하였던 이들은 필사적으로 도강(渡江)하여 서울을 벗어나려 했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민군의 포악성을 잘 몰랐고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동포일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없지 않았다. 그런 기대는 서울에 남게 된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산당에게도 최소한의 동포애와 인간성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수모를 당했으며 마지막에는 무참하게 총살을 당했다.

서울에서만 남궁혁, 송창근, 김유순, 박만춘, 박현명과 새문안교회의 김영주 등 50 여명의 목사들이 납치당했다. 3․1 운동 당시 옥고를 치루고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일한 바 있던 김예진은 린치를 당하고 리어커에 실린 채 총대로 얼굴을 얻어맞은 후 시가지로 끌려 다니다가 천호동에서 총살을 당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모진 시련을 당했고 여․순 반란사건 때에 기독교인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손양원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또한 김인룡, 김윤실 등도 서울을 물러나던 인민군들에 의해 서대문 감옥에서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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