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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와 6.25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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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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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연세대

기독교회와 6.25전쟁 2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곳곳에서 과거 좌익운동을 했던 보도연맹 출신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인민군환영’ 이란 피켓과 함께 현수막을 거리에 걸기 시작했다. 특별히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3․1 운동 당시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이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창준은 태평로에 사무실을 내고 '남선기독교민주동맹'이란 단체를 조직했고, 위원장의 직함을 갖고 피난가지 못한 목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민주동맹’의 사무국장은 경동교회를 다니던 김욱이었고 회원들은 대개 YMCA출신의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협박에 서울에 남아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결국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해야 했다. 그때 고문에 신홍우 목사, 총무에 박성산 목사가 뽑혔다. 그리고 각 교단 대표자로 장로교에 유호준, 김종대, 감리교에 박만춘, 심명섭, 구세군에 황종율 사관 등이 대표가 되어 그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7월10일, YMCA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군환영대회’가 예정대로 열렸다. 그런데 유호준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 김종대가 대신 환영문을 낭독을 해야 했다. 이 일로 김종대는 후일에 부역자로 몰려 한동안 곤역을 치루어야 했다.

당시 대(對)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를 대상으로 북한 인민군을 대변한 인물은 최문식이었다. 대구 계성중학교와 숭실전문,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던 그는 1920년대에 조만식, 배민수와 함께 기독교 농촌운동을 한 인물이었다. 대구 출신인 그는 1926년 1년간 일본에 다녀온 후 사회주의에 공명하여 공산주의자로 변신했다. 해방 후, 그는 경북 인민당 대표이자 경북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소위 ‘10월 인민항쟁’, 곧 대구 폭동을 주도한 바 있었다.

그때 최문식은 교회가 그동안 “비민주적인 기독교를 선포했다”는 내용의 자수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교역자들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을 했다는 것과 미군철수 반대를 선동했다는 것도 아울러 고백하라고 요구했다. 목회자들이 ‘미국의 앞잡이’이고 한국교회가 ‘미국을 돕는 통로’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장로교 목사들이 이승만 정권을 돕고 있고 그를 위해 정치 운동을 했다는 것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렇지만 그는 끝까지 목회자들의 안전을 약속하지 않았다.

김일성정권을 지지하는 궐기대회에 참석하게 하고 남북통일호소문을 작성하게 했다. 그는 강제로 끌고 다니던 교인들을 적극성과 열의가 없다며 구속시키고, 김윤실, 전인선 등을 형무소에서 옥사하도록 했다.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목사 안수까지 받았던 그가 형제 배반의 전율할 만한 만행을 제일 앞장서서 저질렀던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 이외에도 동족에게 총을 겨누고 살육을 일삼았다. 어제 만난 얼굴을 오늘 볼 수 없었고, 오늘 본 얼굴도 어제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 밑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동포요 민족이라는 개념도 애초에 없었다. 한국교회는 한국동란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과 동포애를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 분리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을 그렇게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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