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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 입학과 졸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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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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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3.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대응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강요로 인하여 휴교를 할 1938년에는 초창기 교수들의 절반 이상이 소천하거나 귀국하였으나 남아 있는 교수들도 초창기 교수들과 같이 매코믹 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 그리고 유니온 신학교 출신의 교수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특별히 매코빅 신학은 “개혁파 복음주의, 칼빈주의적 경건주의, 복음주의 장로교 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구학파 전통과 신학파 부흥운동의 역사적 혼합체였다”고 한 것처럼 평양신학교는 휴교를 할 마지막까지 보수주의적 칼빈주의 노선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신사참배의 강요가 허용될 수 없었다. 1930년대부터 시작한 신사참배의 강요는 국공립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선교사들이나 교회가 세운 기독교 학교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제가 학교로부터 신사참배 강요를 시작했지만 실상의 목표는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이 한국을 식민화 하는데 제일 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션학교의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11월 15일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George S. McCune)에게 신사참배 명령을 내린 것에서 시작을 했다. 그전에 이미 다른 지방의 여러 학교에서 신사참배강요와 이를 거부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당국의 제재를 받은 것은 이 사건에서 시작이 되었다.

맥큔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자 총독부로부터 다시 경고가 왔고 이를 거부하자 교장직을 면직당하고 강제 추방을 당해야 했다. 그 때 맥큔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각하에게 이와 같이 알리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1) 신사에서 행해지는 의식들은 저들이 모시는 것을 봐서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것을 봐서 저에게는 분명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2) 민중의 대부분은 영혼이 실제적으로 거기서 숭배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3) 기독교인들은 효도와는 다른 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 믿기 때문에; 그리고 (4) 저도 또한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것이므로 따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각하가 요구하는 행위를 양심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종교가 아닌 국가의식이라고 주장했지만 맥큔은 신사참배가 분명한 우상숭배이며 기독교인의 신앙양심을 가지고 할 수 없는 행위임을 분명하게 직적하고 있다. 그로인해 맥큔이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그리고 숭실여중이 차례로 폐교하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전국의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하기에 이른다.

평양신학교는 당시에 당국의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었고 외국의 선교사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였으며 기독교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였기 때문에 신사참배가 강력한 저항을 해 올 것을 예상한 당국이 직접적으로 신사참배 강요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강요가 있기 전에 학교 내에서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1938년 2월 19일 제 53회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이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때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가 신학교 입학 기념으로 심은 기념식수를 평북노회소속 신학생이었던 장홍련 전도사가 뽑아버린 사건을 시작으로 신학생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다. 이를 감지한 평양경찰서에서 박형룡 교수와 김인준 교수를 불구속 기소하여 연금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검거하였다. 신학생들은 각 노회 각 교회로 흩어져서 신사참배가 반대 운동을 하였고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한 1838년 9월에 학교는 휴교와 함께 폐교에 이르고 말았다.

 

4. 한국장로교회 조직과 발전

1907년은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한지 7년 만에 5년간의 과정을 모두 이수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해였다. 방기창, 이기풍, 하석진,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송인서가 1회로 졸업을 하였다. 이들 졸업생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울 노회가 없었기 때문에 미션공의회는 여러 차례 회의 끝에 독립노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1907년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독립노회를 창립하였다. 독노회 창립에 모인 회원은 목사가 33명이었고 장로가 38명이었다. 목사회원은 전원 선교사였고 장로회원은 전원 조선인 장로 회원이었다. 초대 노회장은 모펫 선교사를 피선하였고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날 비로소 ‘대한예수교장로회 신경’과 ‘신경의 신조의 내역’,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규칙이 가결되었고, 신조도 마련되었다.

독노회가 채택한 “대한 장로교 신경”에서도 우상숭배를 제일 중요하게 고백하고 있다.

1. 신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믿고 행함을 본분의 확실한 법례인데 다만 이밖에 없느니라.

2.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니 오직 이만 경배할 것이라 하나님은 신이시니 자연히 계시고 무소부재하며 다른 신과 모든 형용물과 부동하시며 그 계신 것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시는 일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변치 아니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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