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분류

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4).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양향모 목사

 

192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은 정통보수신학이었다. 장로교신학교의 초기 교수들의 신학이 정통보수요 개혁주의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이 한국장로교회에 그대로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이전에 내한하였던 선교사들의 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며 복음적이었고,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CF)를 따르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는 점에는 거의 모든 논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 J. Brown)의 논평은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에 대해서는 ‘철저한 근본주의’, ‘정통적 복음주의’,혹은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주의 신학이었음에 틀림없다.

초창기 장로교신학교 교수직을 수행하였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인해 한국 장로교는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보수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보수주의의 특징은 성경에 관한 것이었다.

 

1. 김춘배 목사의 여성의 치리권에 관한 문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1930년 이전에도 이미 존재해 있었다. 비록 자유주의 신학이 1930년대에 눈에 띠게 노출됐지만 장로교 선교내의 자유주의 영향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출발 때부터 존재했으며 보수주의와 함께 병존하고 있었다.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1934년 23회 총회에서 있었던 김춘배 목사의 여성의 치리권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사실은 여성의 치리권에 관한 문제보다는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세운 그의 성경관이 더 큰 문제로 등장했다. 김춘배 목사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이 여자는 가르치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것은 2천 년 전 한 지방교회의 풍습에 불과한 것이고 진리는 아니라고 것이다.

23회 총회는 김춘배 목사의 이러한 주장을 나부열, 부위렴, 염봉남, 윤하영, 박형룡씨에게 연구 결안하며 다음 총회에 보고토록 하였다. 연구결과 김춘배 목사의 자유주의적 성경해석을 문제 삼았고 치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김춘배 목사는 자신의 기독신보 기고문 ‘여권문제’ 사건은 본인의 근본 의도가 성경을 해석하려 함이 아니고 이미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음을 감안한 것이며 성경의 권위와 신성을 손상시키려는 의도가 아니었음을 해명하고 교회에 피해가 파급될 우려가 있으면 취소하겠다고 하여 일단락되었다.

 

2.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

뒤를 이어 같은 해에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주일학교 연합회에서 출간한 “만국 주일 공과” 장년부 편에서 김영주 목사는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가 아니라 히브리의 신화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라고 했다. 1935년 24차 총회에서 단호하게 “창세기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한 김영주 목사께 대하여 교역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짓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3. 성경중심 사상의 변질로 인한 신사참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당시 장로교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무식하고 고지식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는 자신들의 신학을 지식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자평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신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제일 중요한 신학사상이다. 이 성경중심의 사상이 변질됨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에 쉽게 굴복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철두철미하게 따라야 할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오한 법칙이라고 믿는다는 원칙이 변질됨으로 인해서 하나님만 섬기며 우상에게 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최고의 계명이 권위를 잃고 세상과 타협하여 교회의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4. 신사참배로 인해 몰락한 보수주의

한국교회가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을 때 가장 비극적인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교권을 장악함으로 보수주의 신학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신사참배에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일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도피했기 때문에 신학교를 비롯해서 교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반면에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일제에 타협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신학교와 교회를 주도하였고 한국교회에 자유주의가 폭넓게 활동하게 된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굴복하기 이전에는 보수주의가 중심을 이루었지만 보수주의 신학을 가진 목회자들이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서 자리를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한국교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그들의 신학을 한국 교회에 전파하기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상존하고 있었지만 그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다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후 그들과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확장이 되었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