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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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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신사참배에 대한 교회의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마지못해서 용인하거나 도피하는 도피형과 타협을 하고 수용을 하는 타협형과 순교를 각오로 적극 불참하는 항거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교회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사람들(타협형)

타협형은 일제와 타협하여 교회를 지키고 학교를 운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고 국민의식문제로 이해를 했다. 천주교와 감리교가 먼저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규정을 했고 장로교회도 대부분 수용을 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일부분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들이 일제와 타협을 하고 말았다.

미 북장로교 한 선교사는 1939년 7월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 아마도 90 퍼센트, 어떤 한국인들이 추산하는 바에 의하면 98 퍼센트나 되는 많은 분들이 그들의 양심을 누그러뜨려 정부의 요구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많은 분들에게 양심의 소리는 약한 것이었습니다.” 라고 했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분들이 신사참배를 앞서고 독려하니 어린양들이 가련하게도 뒤따라 하게 된 것이다.

박용규는 당시에 일제의 탄압에 의해 200여교회가 문을 닫고 2,000여 성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했다. 이상규 교수도 2,000여명이 투옥되고 50명 정도는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밝혀진 순교자는 30여명에 불과하고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인사는 20여명에 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당시 장로교의 3,000개 교회 35만 성도의 수에 의하면 아주 적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타협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들의 주장은 신사참배가 신앙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을 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신앙의 핵심인 계명을 어긴 것이며 배교를 한 것이다.

 

2. 마지못해서 용인하거나 도피하는 사람들(도피형)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그것이 불법인 줄 알지만 육신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척 하면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가하면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직에 물러나서 초야에 묻혀 개인의 신앙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학업을 이유로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김인수는 일제에 타협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절반이나 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뜻있는 인사들은 지하로 숨에 한 때 70만을 헤아리던 개신교인의 숫자가 그 절반으로 줄어들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당수가 현 상황을 피하여 개인의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느 해 총독 미나미는 제국회의에서 시정 보고를 하면서 “조선 통치는 원활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철저하게 투옥하면 할수록 비록 음성적이기는 하지만 반대세력은 여전히 움트고 있었다. 미나미 총독이 지칭하는 40만 중에는 노골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개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초야에 묻혀서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환란기간 동안 공부를 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떠남으로 고의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도피한 사람도 있고 농촌으로 내려가서 농촌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단순히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계몽하는 운동이었으며 민족운동이었다.

 

3.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들(항거형)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된 신자 중 감옥에서 순교한 이들이 5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중에 30여명 정도가 옥중에서 순교했거나 출옥 후 고문이나 병약함으로 순교했다. 이점에 대한 더 정확한 조사가 아직 이루지지 않고 있다.” 김승태는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를 교파별 지역별로 조사하여 그의 책에 기록하고 있다. 장로교에 소속된 사람은 평북에 고흥봉 목사를 위시해서 24명, 평남에 김선두 목사를 위시해서 20명, 황해에 박경구 목사를 위시해서 10명, 함북에 김무생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를 위시해서 31명, 경북에 이원영 목사를 위시해서 20명, 충북에 송영희 목사를 위시해서 2명, 전북에 김가전 목사를 위시해서 5명, 전남에 강순명 목사를 위시해서 46명, 만주에 계성수 목사를 위시해서 26명, 일본에 김은석 목사를 위시해서 8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감리교에 강종근 목사를 위시해서 9명, 성결교에 김기삼 목사를 위시해서 11명, 동아기독교에 김영관 목사를 위시해서 12명, 안식교에 최태현 목사 1명으로 총 229명이라고 한다. 이 중에 옥중에서 혹은 풀려나서 그로인해 순교한 사람이 29명이며 그 중 장로교에 속한 사람이 18명이고 기타가 11명이다. 신사참배 반대로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감옥에서 순교한 장로교 목사는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허성도 목사, 박연세 목사, 양용근 목사 등 5명이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네 명의 목사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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