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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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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고흥지방 연합 사경회로 인해서 양 목사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경회여 참석했던 포두 주재소 소장이 고흥경찰서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양용근도 곧 소환되어서 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펴졌다. 더 이상 양 목사가 고흥지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례에 있는 구례읍 중앙교회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급히 후임을 정하고 구례로 떠났다. 교회를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자신이 가는 교회를 알려주지 않았고 구례읍 중앙교회로 가면서 이름을 양복근으로 바꾸고 부임하였다.

 

1. 구례읍교회

구례읍교회는 1894년 12월 24일 미국을 유람하다가 복음을 듣고 귀국한 고형표씨가 구례읍 봉동리 280번지에 예배처소를 정하고 출발을 하였다. 1895년 의병의 난으로 인하여 교인은 해산되고 예배당은 일본군이 점거하여 일시 폐쇄되었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 배유지 목사가 예배당을 다시 찾아 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908년 8월 2일 구례읍교회로 명칭을 정했다. 1921년 현재의 장소인 봉동리 471번지에 대지 160평을 매입하여 이전하였고 1954년 11월 1일 구례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른 교회이다.

양용근 목사는 이 교회에 1940년 3월 31일에 부임하여 1943년 12월 5일 광주형무소에서 순교할 때까지 구례읍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양용근 목사가 구례읍교회로 올 때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양복근이라고 가명을 썼으며 교인들에게도 후임지가 어디인지 알리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구례는 순천노회 소속교회였으며 지역적으로 순천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당시 흔하지 않는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금방 신분이 탄로가 났다.

양용근 목사가 구례읍교회로 온 1940년은 이미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을 하고 난 후였다. 1938년 총회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 하였고 그 이듬해인 1939년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결성식을 거행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때였다. 1940년은 자유주의자들이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워서 총회 인준을 받았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기 이전에 이미 55%의 교회가 신사참배에 동참했으며 동방요배는 96%가 이미 참가하고 있었다. 총회는 총회시작 전에 국가 의식으로 동방요배를 하였고 신사에 가서 참배 후 총회를 개회하기도 했다. 이제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고 검거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런 시기에 도피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면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일본 경찰은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를 했고 회유와 협박을 하고 있었다.

 

2. 창씨개명 강요

구례읍 교회에서 일경이 양 목사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창씨개명요구와 가미다나를 교회에 모시라는 요구였다. 창씨개명은 양 목사 자신의 고통일 뿐 아니라 학교에 다니고 있는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문책을 당하고 체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창씨개명은 조선 사람으로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성씨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고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일제가 괘씸하기는 하지만 신앙의 문제와는 별개였다. 일경의 회유와 협박에 이기지 못하여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 이름 속에 비밀을 만들어 창씨개명을 하였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양천정일(梁川正一, 야나까와 세이이찌)였다. 그러나 속뜻은 같은 발음인 양천정일(梁遷征日)로 생각하였다. 여기 양천(梁遷)은 다시 양으로 바꾼다는 뜻이고 정일(征日)은 일본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언젠가는 일본을 정복하고 다시 양씨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다.

 

3. 가미다나 설치 강요

가미다나(かみだな, 神棚)를 교회에 걸어놓고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절을 하고 예배를 시작하라고 강요하는 일본 경찰의 강요는 양 목사로서 절대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 목사는 길두교회에 있을 때도 신사참배는 물론 미신을 섬기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그런 그가 일본 천조대신의 위패와 신사의 축소판으로 신사를 상징하는 가미다나를 그것도 교회에 모신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형사에게 천조대신을 모셔놓고 잠깐 절하고 다른 신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그동안 천조대신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역으로 설득을 하여 일단 돌려보냈다.

양용근 목사가 구례읍교회에 시무한 기간은 4년여에 달하지만 그러나 수시로 경찰의 감시를 받고 경찰서로 불려 다니던 중 1940년 11월 15일 구속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시무한 것은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다. 그가 체포 된 후에 각혈을 하는 심한 해소천식으로 인해서 병보석으로 일시적으로 석방되어 2년 정도 목회를 했으나 일본 형사의 심한 감시로 인해 활발하게 목회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함께 구속되었던 순천노회원들과 같이 재판을 위해서 1942년 9월에 재 구속 되었고 그 후로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의 길로 갔기 때문에 실제 목회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양용근이 평양신학교를 입학하고 목회를 시작한 1935년은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로 인한 교회탄압이 이미 시작된 때이다. 특별히 양용근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1939년은 “국가주의에 굴복한 1930년대의 조선예수교”라는 박용권의 주장대로 이미 교회가 일제에게 굴복한 후였다. 1938년 9월 총회에서 심사참배를 가결하였고 그 이전에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미 신사참배를 거행하며 일제에 굴복하고 말았다. 목회를 하다가도 그만두고 도피하는 사람이 많은 이런 시기에 목회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나선 것은 보통으로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한 상황에서 그의 목회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나 담대하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조선의 미신을 타파함과 함께 일본의 우상인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봉안전 참배 등을 하지 말도록 가르쳤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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