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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구원의 기독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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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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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기독교서회에서 회장 구세군 황종률의 주재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orea National Christian Council, KNCC)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김유순과 박만춘을 비롯한 감리교 목사들과 황종률, 한경직, 송창근, 김종대, 김인서, 강원용, 김유연 등 한국교회 연합의 ‘대한기독교구제회’를 조직했다. 국군을 돕고 피난민을 구호하자는 취지였지만, 그것은 국가구원 의식을 전통의 하나로 보았던 한국교회의 본능적 태도였다. 그러나, 한경직이 회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오는 바람에 활동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겼을 때인 7월 4일, 서울을 급히 빠져나간 목회자들은 다시 대전YMCA에 모였다. 목회자들은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고 한경직을 회장으로 다시 추대했다. 곧바로 대구를 옮겨야 했지만, 대구와 부산을 위시해서 약 30개의 지부를 두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대한기독교구국회’의 주된 목적은 민심을 수습하고 피난민을 구호하며 국군을 위문하는 것 등이었다. 전세에 따라 국군들과 함께 평양에 입성하기도 하고 1․4 후퇴 시에는 다시 부산까지 내려가면서 군 위문과 선무(宣撫), 원호사업을 했다. 국민들의 용기와 단결을 북돋았고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호소하는 계몽 강연회도 열었다. 평양이 수복될 때도 국군들과 함께 평양에 들어가 선교와 평양 시민의 선무(宣撫)에 나섰다. 기독청년들을 십자군의 이름으로, 그리고 구국의 사명을 품게 해서, 전선으로 보내는 역할도 했다. 서울을 탈환한 후 유엔군과 국군이 북으로 진격했을 때는 북한에 적을 가지고 있었던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을 약 1천명을 선무공작대원으로, 국군의 점령지역에 파송하기도 했다.

 

1.4 후퇴 당시, 공산주의의 악제(惡制)를 경험했던 북한의 주민들과 대다수 교인들이 월남했던 상황이었다. 5만 9천 명의 전쟁고아가 있었고 10만 2천명의 여성들이 남편들을 잃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전상자들과 전재민들이 있었고 대부분 굶고 있었다. 방방곡곡에 구호 대상자들이 가득했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헐벗었고 치료할 약이 없었으며 누울 곳이 없었다. 약 1천만 명이 구호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자, 손 쓸 방법이 없었다.

한국 전재민들에 대한 구호는 외국정부와 외국 원조단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외원단체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쟁고아와 미망인들을 위해서도 시설을 짓고 돌보았다. 그때 한국교회는 이들 외원단체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미영어를 할 수 있는 자원을 가장 많이 확보한 곳이 교회였고 세계교회와 기독교 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이 한국교회였다. 그것은 교회의 당연한 사명이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데 있고, 생명의 문제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함께 있다. 복음에 잡힌 사람들은 생명 유지를 위한 긴급한 현장의 소리를 듣고 거기 찾아간다. 사무치는 인간애로 복음의 거대한 능력을 발휘하고 또 그런 일을 가능하도록 현장의 진상을 전달한다. 제외되었다고 버려진 생명이라도 소외시키지 않으려 하고 이 세상에 온누리 공동체를 이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순서와 그 목표가 뚜렷했지만, 영혼과 몸의 통전적 구원이 기독교 복음의 목적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신봉하던 복음주의 신학은 그것을 강조한다.

 

 

김명구 박사(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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