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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교회와 세 사람의 영수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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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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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1948년 4월 19일,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경교장을 나서려 할 때, 월남한 황해도민들, 강원용이 이끄는 청년단체, 김구가 출석하고 있던 남대문교회 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서북청년단원들, YWCA의 최이권, 최이순, 백낙준의 부인을 비롯한 부녀자 등 수 백 명이 결사적으로 이를 막았다. 안악사건으로 김구와 같이 옥고를 치렀던 목사 도인권도 공산주의자와의 협상이 불가하다며 말렸다. 그럼에도 김구는 이를 뿌리치고 평양을 향했다.

1946년, 김구는 김일성을 살해하려 할 만큼 공산주의 정권에 증오감을 보였다. 이들이 하나의 독립 국가를 헤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미 20만의 인민군을 갖고 있었다. 이런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남침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 막고 싶었다.

두 사람은 민족적 호소로 북한정권을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을 민족의 테두리 내부로 끌어 들이려 했고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김구가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이다”라며 극찬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북한으로 떠나기 전, 김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 했다.

 

남북회담은 성공되리라고 그다지 큰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단지 통 사정하려는데 지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이 이번 북행했다가 만일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내가 통일독립을 위해서 끝까지 싸웠다는 것을 삼천만 동포에게 전하기 바란다.

(중 략)

과거 미소양국의 힘으로써 조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앉아서 같은 조선 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나 하여 보자는 것이 진의(眞意)이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生)을 깨끗이 조국통일 독립에 바치려는 것이 이번 이북행의 목적이다.

 

김구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게 민족적 접근을 시도했다. 단일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와 38선의 철폐를 기대했다. 이를 위해 공산주의의 잔혹성을 애써 모른척했다. 그렇지만 적개심으로 가득했던 북한정권의 사상적 투쟁심과 패권적 이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온 뒤인, 1948년 7월 19일, 남북협상 포기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이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치러진 이유도 있었지만, 북한이 1948년 7월 19일에 갖기로 한 제2차 남북협상의 약속을 깨고 남로당을 비롯한 공산 단체들과 제2차 남북협상을 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구나 김규식의 기대와 달리,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국기까지 바꾸는 등 북한만의 단독 정부를 선언했다.

김구에게 하나님은 “대한(大韓)”의 수호자이고 이 땅의 거민은 그것을 위한 “천국 백성”이되어야 했다. 그래야 한반도는 “지상천국”이 될 수 있었다. 기독교인은 “이 땅의 천국을 건설하는 천국백성”이 되어야 했다. 이 땅의 거민들은 하나의 조상, 하나의 조국, 하나의 국토, 하나의 운명을 가졌다고 보았다. “빨갱이들도 피와 뼈를 같이 한 우리의 동포, 동족끼리 마주앉아 최후의 결정을 봐야겠다”고 피력했던 이유이다.

김구는 한국의 백성들이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 혹은 개인의 권리보다는 ‘독립 국가’와 ‘민족’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민족적 과제를 수행해야 할 애국적 국민을 요구했고 기독교와 기독교회에는 그런 사명을 요구했다. 자신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개인구령의 영역이 없었다. 그에게 기독교는 민족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괴리가 있는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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