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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교회와 세 사람의 영수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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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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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1946년 10월 4일 김규식은 여운형과 ‘합작 7원칙’에 합의했다. 그때 두 사람은 토지를 유조건 몰수해서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하자는 원칙과 함께 남북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정했다.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일부에서 김규식을 사회주의자로 치부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규식이 기독교인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는 아니라고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남북의 합작 주장이나 토지의 무상 분배 제안은 한국교회의 의구심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김규식은 6살 때 언더우드의 고아원학교에 맡겨진 이후, 기독교 복음의 역할과 사명을 익혔다. 탁월한 영어실력으로 선교사들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새문안교회의 일원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1910년 새문안교회가 종로구 신문로 1가 대지 위에 새 예배당을 지을 때 건축위원회를 대표해 예배당 증서와 열쇠를 증정할 정도로 교회 내의 위치가 확고했다. 제1회 학생YMCA 사경회 때에는 강사로 참여했다.

장로교 처음 총회를 시작할 때 영문 보고서를 작성을 했고, 한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주저 없이 고백했을 때 장로교회 전체가 그를 주목했다.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미국 로토크대학(Roanoke College)를 입학한 후 2등으로 졸업할 정도로 그 명석함도 남달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YMCA 교사와 이사로 일하며 언더우드 곁을 지켰다.

1918년 김규식은 일본의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는 것에 지쳐 상하이로 떠났다. 그리고 32년 동안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1919년 한국의 ‘자결권’을 얻기 위해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파리강화회담에 갔다. 그리고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부장이 되었다. 1921년 모스크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회의’가 열렸을 때는 한국대표단을 이끌었고, 여운형 등과 함께 5인의 주석단에 피선되었다.

김규식은 독립운동을 위해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성명을” 해야 했다. 중국인 행세도해야 했던 상황이어서 집안도 돌볼 수 없었고 예배를 볼 수 없었으며 성경책도 가질 수 없었다. 그 어려움을 “혁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아래 견뎠다.

그런데 그런 김규식의 그런 고백은, 개인구령의 영적영역이 약화된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한국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국(救國) 의식은 강화되었겠지만, ‘역사 주관자에 대한 절대적 의뢰 의식이나 단독자로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식이 약해졌을 것이다. 인간의 죄성과 그에 대한 고민, ‘구원’, ‘은총’ 의식은 영적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다져지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1946년 2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국무부는 연합국인 소련과의 협력과 협조를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었다. 이런 기조아래, 소련과의 적극적인 협상을 추진하려 했고, 좌우합작의 중간정책을 시도하려 했다. 그런 이유로 미군정에 이승만과 김구를 일시적으로 은퇴시키고 향후 소련과 적극적으로 협상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의 군정은 김규식이나 미국에 와 있던 서재필을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정책을 실행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 의식을 갖고 있던 한국교회는 좌우합작을 원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김규식 등을 선호하지 않았다. 영적인 영역의 약화와 반공의식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김규식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김명구 박사(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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