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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교회와 세 사람의 영수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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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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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이승만이 돌아왔을 때,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던 정쟁(政爭)이 잠시 멈출 정도였다. 국내의 각 정파들은 일단 숨을 죽였고 이승만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한 사회도 그가 건국과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민족의 여망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남한의 민족주의계 정파가 그를 영수로 추대했고 좌익도 이승만을 인정하고 있었다. 김성수, 송진우, 윤보선 등 기호계 민족주의 그룹이 그랬고 신익희 등 상해 임시정부계도 이승만 이외는 적임자가 없다고 보았다. 노기남이 이끌고 있었던 한국천주교회까지도 이승만을 선택했다. 박헌영이 주도했던 인공까지도 주석으로 추대했다. 미군정이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을 종용했던 이유이다.

한국교회는 이승만을 선택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주장했을 때도 당연하거나 불가피하다며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남한 사회의 지지 분위기와 이승만을 강력히 지지하고 후원했던, 이규갑과 배은희(裵恩希)가 감리교 유지위원장과 남부 장로교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던 것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교회 내의 영향력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맹종에 가까울 정도로 이승만을 선택한 것은 한국기독교계 내부의 두 축, 곧 개인구원의 영적 영역과 국가구원의 영역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교회 내부는 우선 과제에 대한 의견과 그 지향이 뒤엉켜 있었다. 대부분은 교회 재건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던, 개인구령의 문제를 우선 했던 그룹이었다. 그러나 국가구원을 최우선으로 보았던 그룹도 있었고 개인구원과 국가구원의 병립을 주장했던 그룹도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만큼 이 세 그룹 모두를 만족시키는 인물은 없었다. 덧붙여 이승만은 미국과 연결점을 갖고 있다는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영미복음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 졌고,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인들이 누리는 풍요로움과 자유, 사회개선과 사회정의, 민주주의 체제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션스쿨 배재학당을 나왔고, 이곳을 통해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익혔다. 이를 독립의 근거로 삼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전술한대로 그는 한성감옥에서 회심체험을 할 때 한국의 구원과 함께 자신의 영혼구원을 함께 구한 바 있다. 그때 이승만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영혼의 구원자라는 고백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독교는 건국을 위한 이데올로기나 한국인들의 교화를 위한 구도자, 구국(救國)의 도구만이 아니었다. 구령(救靈)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복음의 귀결점으로 인정했던 정치 영수(領袖)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정동교회에서 남부대회가 열렸을 때, “40년간에 일본 학정 하에서 사람이 당치 못 할 감옥생활과 신사참배문제 등 가진 압박(壓迫)을 당하였지만 신앙을 유지”한 것에 남다른 경의를 표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고, 신사참배라는 영적 굴욕과 수치를 당했던 한국교회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했던 것이다.

한편,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 선언되기 이전, 이승만도 완전무결의 근대 독립 국가와 통일정부 수립을 원했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이 추진하고 있던 좌우합작 정책을 쫓으려 했다. 그래서 박헌영과 합작이 가능한지 접촉했다. 그러나 유신론과 유물론의 입장과 신념에 따라 새나라 건설하려 했기 때문에 양자가 함께 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기독교 건설론을 들고 나왔지만 박헌영은 반 기독교적 신념아래 기독교회의 제거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기독교회를 압제하고 필연적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했을 때,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들이 무신론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함께 할 수 없다고 선언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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