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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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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섭 교수 김홍섭 교수

오늘 우리사회는 복음과 이데올로기의 혼돈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복음을 각기 자기에 유리하게 부분적으로 이용하거나 왜곡하여 특정 세력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논쟁이 있다. '복음'(gospel)이라는 말은 '좋은 이야기'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god-spell'에서 유래하며, '기쁜 소식' 또는 '좋은 이야기'를 뜻하는 라틴어 'evangelium'과 그리스어 'euangelion'을 번역한 것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수도의 삶과 십자가 죽음과 구원 그리고 제자들의 전도 등을 포괄하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핵심으로 한다.

이데올로기(이념, 理念; 독일어, ideologie; 영어: ideology)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규정짓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 또는 허위의식을 가리킨다. 프랑스 혁명기에 철학자 데스튀트 드 트라시(A. Destutt de Tracy,17541836)가 자신의 '관념의 과학'의 약칭으로 도입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오늘 우리에게 특히 문제되는 것은 정치적 관점에서의 좌우이데올로기에 대한 개념과 갈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좌우개념은 본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 급진적인 자코뱅 당은 의회의 왼쪽에, 온건한 지롱드 당은 오른쪽에 앉으면서 유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시대에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큰 목표아래 좌우의 이념이 크게 갈등하지 않고 협력하거나 공존해 왔다. 광복 이후에 사회주의 계열을 좌파, 자본주의 계열을 우파라 하며 상이한 입장을 갖게 되고 결국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보수와 진보(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좌우를)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북한에 대한 시각, 미국과 중국에 대한 시각 그리고 통일에 대한 관점 등이 주요 요인이다. 경제적으로 성장과 분배에 대한 관점과 재벌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소상공인과 자영업에 대한 관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복지와 소외 계층(가난한 사람, 장애인, 외국인 등 다문화 계층, 소수자 등)에 대한 관점 등이 주요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보수의 일반적 시각은 정치적으로 북한을 괴뢰집단, 군사적 관점에서 주적(主敵), 김정은은 타도 대상 등으로 보며, 미국 중심의 안보, 경제 체제를 강조하며 중국은 북한의 배후, 동조자로 요주의 국가 또는 거리를 두어야하며, 미중 갈등 시 미국편을 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통일에 대하여는 필요성에 대해 낮은 동의를 보이며 통일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문조사가 많고, 통일 되어도 실익이 적으며 남한의 엄청난 부담과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성장을 통한 부의 증대와 그 결과 낙수효과(trickle down)를 기대하며, 대기업 등의 성장을 통해 파이를 크게 한 후 더 많은 파급효과와 분배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대기업의 국제경쟁력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국가의 부를 키우고, 중소기업으로 그 파급효과나 전후방 효과가 확장되어 전체적 국가 부를 늘릴 수 있다는 입장이며, 기업에 자율과 시장경쟁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이 향상되고 좀비 기업들이 퇴출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들도 대기업과의 상생 협력으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적으로는 복지는 소위 선택적 복지 틀에서 국가는 최소한의 복지 기반을 제공하면 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더 나은 복지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옳지 모두에게 복지를 확장하는 것은 국가적 비효율과 생산성을 낮추는 결과를 낳고 게으름뱅이와 사회적 무노동 분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국가적 혜택 제공도 제한적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 일반적인 진보적 관점은 북한은 대화와 교류를 통해 남북 쌍방이 성장할 수 있고 어려움 속에서도 평화와 통일의 길로 더 전진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군사적으로도 DMZ을 평화적 이용, 적대행위 저감을 위한 노력 제고 등을 제시한다. 미중관계에서 미국을 최고 우방으로 우대하되 미국의 자국우선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익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주장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며, 중국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며, 한중무역이 우리 교역에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통일에 대한 필요성과 전향적 정책에 대해서는 높은 동의를 보이며 통일은 민족의 필연의 과제이자 소원이며 필요시 남한이 단기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북한을 돕고 남북경제협력과 의존도를 높혀야함을 더 크게 주창한다. 경제적으로는 성장도 중요하나 분배와 공평의 헌법정신(헌법 제119)을 강조한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가 정경유착과 IMF사태를 가져온 주요 원인으로 보아 대기업/중소기업의 협력과 공정거래를 강조하며,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산업참여를 조정, 제한하여 중소기업을 보호한다. 사회적으로는 복지를 더 넓게 그리고 관련 예산을 더 많이 편성, 집행하며 특히 노인복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강조한다.

우리사회의 이런 진보와 보수의 지향점들은 지난 역사에서 나름대로 타당성을 갖으며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문제는 극우와 극좌 성향의 지나친 주장과 이를 이용하는 정치세력과 집단이기주의 등으로 양 간격이 심화되고 상대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어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상대의 주장을 무시하며 오히려 적대시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의 삶의 시대(BC3~AD30)와 이후 제자들에 의해 신약성경이 완성되고 초대교회와 로마가톨릭 시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및 근세와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나 좌우이념은 예수님의 시대로 부터 무려 1700년 이상을 훨씬 뛰어넘는 긴 시간과 간격이 있다. 성경과 예수님 복음은 작금의 이념논란과는 상관없이 이미 거의 1800년 전에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진리와 가치 체계를 가장 아름답고 명료하게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산상복음에서 참 진리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명료하게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라고 복음의 진수를 제시하셨다.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10계명도 1-4계명의 하나님 사랑과 5-10계명의 이웃사랑을 명징하게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리고 구약의 핵심 진리의 하나인 여러 제사제도와 안식일 제도 및 희년(Jubilee)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와 공동체적 공존과 가치체계를 오래 전에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20:1-15)에서 일찍 온 품꾼이나 나중에 온 품꾼이나 동일하게 하루의 품삯 한 데나리온은 동일하게 주어 삶의 기본 조건의 필요와 이의 제공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셨으며, 동시에 열심히 일하여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의 높은 성과를 창출한 청지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상주셨다(25:14-30). 성경과 예수님의 복음은 오늘 우리의 갈등이라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라는 좌우와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이미 완전하고 통전적으로 해결하시며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런 완벽하고 오묘한 진리 체계를 후대 스미스나 마르크스 등의 학자들 또는 후대의 정치가, 이론가들이 성경의 근본 사상을 원용하거나 일부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후 형성된 진보와 보수 또는 좌우이념으로 복음을 끌어들이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복음을 제단하는 선동가, 또는 거짓 예언자들의 언행은 복음의 근본에 매우 먼 것이다. 복음을 특정 파당의 이익을 위해 소위 이데올로기라는 좁고 작은 틀로 제한하는 행위는 자의적이며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복음의 통전적 이해보다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또는 반대 정파를 비판을 위해 복음을 편파적으로 해석하여 국론을 나누어 갈등을 심화시키는 행위는 허망하며 위선적이고 거짓되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종교개혁가 존 칼빈(J. Calvin,1509-1564)의 경제윤리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의 경제윤리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커다란 신학적 틀 속에서 인간의 경제활동은 물질세계와 관계된 하나님의 창조(문화)명령(cultural mandate)수행이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청지기적 사명이 기초가 되나,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웃을 자신 탐욕으로 이용하여 경제적 불균형과 부정의가 초래됨을 지적하였다. 그의 경제사상은 후에 베버(M. Weber,1864-1920)에 의해 자유경쟁과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로 이해가 강조되어 미국을 통해 우리에게 전파되었으나, 다른 한 축인 비엘레(Andre Bieler)와 트뢸취(E. Troeltsch,1865-1923) 등의 공동체 경제사상 등은 우리에게 간과되었다. 종교개혁자 칼빈 등의 개혁과 예수님 복음과 초대교회로의 회복과 실천이 인류의 정책과 제도에 이루어졌다면, 이후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인류가 그렇게 많은 피와 아픔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새삼 새롭기도 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의 기도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며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 실현되며,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10:10)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가 선한 청지기의 삶과 일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 공의와 사랑의 구약 근본원리를 회복하고 적어도 초대교회와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특정 정파의 이익을 위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편취하며 상대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복음을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복음을 대체하는 것은 아파트에 사는 바퀴벌레 안에 아파트를 우겨 넣는 것과 같다란 한 정치학자의 말이 새롭다. 복음은 온전하며 인류의 온전한 삶과 구원과 영생에 온전한 길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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