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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경영 | 사무엘슨과 프리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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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섭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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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학의 양대 산맥으로 우리는 스미스(A. Smith)와 케인즈(J.M. Keynes)를 든다. 스미스는 자유 시장주의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한 시장경제의 근본을 정립한 이라 할 수 있고, 시장 실패와 경제 공황을 중요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정부의 개입과 통제를 주창한 케인즈로 양분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우리 인간의 경제와 경제정책의 결정에 늘 긴장과 견제를 해 오고 있다.

케인즈의 이론을 이은 경제학자들을 케인지안 (Keynesian)이라하며 그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인 경제학의 신동인 미국 경제학자 폴 사무엘슨(P. Samuelson)이 94살을 일기로 12월 13일 타계했다. 그는 열역학의 개념과 수학을 도입해 경제학의 분석 방법을 정밀하게 만들었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새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가 미국인 경제학자 중 최초로 1970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무엘슨은 시카고대학을 조기입학,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기를 바랐지만 1930년대만 해도 유대인 차별이 심해 뜻을 이루지 못해, 같은 도시 케임브리지에 있는 유명한 공과대학 엠아이티(MIT)에 가서 경제학과를 개척해 세계 굴지의 학과로 만듦으로써 한을 풀었다. 그는 박사논문 ‘경제분석의 기초’로 명예를 얻었고, 경제원론을 써서 돈방석에 앉았다. 그가 1948년에 쓴 경제원론은 처음 나왔을 때 좌파 교과서로 매도당했다. 당시는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워낙 보수적이었고, 게다가 매카시즘이란 반공주의 광풍이 몰아칠 때였다.

그와 다른 입장에 서 있던 대표주자가 밀턴 프리드만( M. Friedman)이다. 그는 국가 개입을 비판하며, 시장만능을 신봉하는 시카고학파의 대부로서 평생 라이벌이었다. 한때 프리드먼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 골드워터의 경제참모로 일했고, 사무엘슨은 민주당의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경제참모로 일했다. 두 사람은 <뉴스위크>지에 매주 칼럼을 쓰면서 서로 대립했다. 프리드만은 ‘자유주의 철학의 심장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고, 자기와 똑같은 것을 하려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기의 능력과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자유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한 면에서는 사람들의 동등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그들의 불균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각자는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중요하고 기초적인 권리이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이 사람은 자유를 가지고 저 사람과 다르게 하기를 원할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일반적 문화에 대해 저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는 한 면에서 권리의 균등과 기회의 균등을 정확하게 구분할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물질적 균등이나 결과의 균등을 정확하게 구분할 것이다.

자유 사회는 사실 자금까지 시도된 어떤 다른 것보다 물질적 균등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는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이것을 자유 사회의 바람직한 부산물로 간주할 것이지 자유 사회의 주된 정당성으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는 행운이 적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민간 자선 행위를 자유가 적절하게 사용된 한 예라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빈곤을 개선하기 위하여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지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공동 목적을 달성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발적인 행동 대신 강제적인 행동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감을 가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슨은 돈 문제에 철저했음을 보여주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1970년대 초 MIT 도서관의 복사기는 가끔 고장을 일으켰다. 동전을 넣어도 복사가 안 되는 경우 옆의 장부에 사인을 하면 직원이 동전을 내주었다. 하루는 노신사가 와서 사무엘슨이라고 사인을 하기에 “혹시 당신이 그 유명한 경제학자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더란다. 두번 째 이야기는 1970년대 말, 한국의 어느 신문사가 사무엘슨을 인터뷰하러 갔다. 사례금을 봉투에 넣고 약속 시각에 연구실로 갔다. 사무엘슨은 인터뷰 전에 돈을 달라고 했고, 돈을 세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시계를 보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고 한다. 석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면모가 아니가 한다. 동시에 프리드만도 금융위기 때에 신자유주의 경제의 중요 이론가로서 많은 시민운동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음은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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