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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사역 | 화해와 용서의 아기를 살려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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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용일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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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과 화해와는 거리가 먼 총칼과 그에 대한 보응으로 불안한 시대이다. 강재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1천만 명을 넘어선 한국 영화들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그 전의 <실미도>와 내용과 흥행도 비슷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마치 오늘 우리 시대의 정서를 보여주듯이 “김일성의 목을 따 온다”는 공통적인 대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공통된 정서를 담고 있으나 <태극기 휘날리며>에는 놓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흔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이념 대립에는 가족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념의 추구와 가족의 사랑을 대립시키며 결국 우리가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 도전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50년에 있었던 한국전쟁의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는 이념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을 가족의 역사 속에 투영시켜 넣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영화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우리네 전통적인 가족사의 아픈 모습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고생하다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어머니, 가난한 살림살이는 당연하고, 몸이 약하지만 똑똑한 동생에게 기대를 걸고 형이 희생하며 뒷바라지를 해주는 모습이 전형적인 우리네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보통은 형이 집안의 기둥이 되고 동생들이 뒷바라지를 하며 희생하긴 하지만).

원하지 않는 참전이었지만 전쟁터에서 형제를 생존하게 한 것도 바로 형제 사랑이다. 형 진태는 동생을 제대시켜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선에서 앞장선다. 대대장과 면담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진석이가 가문을 잇고 아버지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다. 그렇게 점점 전쟁에 미쳐가는 형을 바라보는 진석은 형의 무모한 용기를 만류하지만 형의 광기는 점점 더해간다. 진태는 동생을 살리려고 전쟁 영웅이 되려 했지만 점점 이념에 도취하여 ‘가족’을 잃어가는 것이다.

북진하면서 의용군에 잡혀가 포로가 된 종로 골목의 구두닦이 동생 용석을 만났을 때에도 진태의 광기는 멈추지 않는다. 용석이를 죽이려는 진태와 살리려는 진석의 형제간 갈등이 이 영화에서 이념 대립과 가족 사랑이 교차되는 시작점이다. 용석의 죽음 이후 1․4후퇴 시 잠시 서울 집에 들른 진태가 청년단에 잡혀 처형되려는 약혼녀 영신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도 결국 진태가 이념에 도취되어 가족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진태의 광기는 결국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 이후 동생이 포로수용소에서 불에 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극에 달했다. 나라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믿어보려고 했던 이념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진태는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 것이 아니라 인민군의 소좌 이진태로 거듭나 전설적인 ‘깃발 부대’를 이끌면서 국군을 무찌르는 적이 된다.

결국 불타던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후송을 갔던 진석이 다시 전선을 찾아 형을 만나려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백병전의 와중에 정신없이 진석을 죽이려던 진태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번뜩이는 흰자위는 그가 얼마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다가 진석이 ‘가족’ 이야기를 하자 멈칫한다. 진석이 “엄마도 만나고 영신이 누나 산소에도 가야 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자 진태는 제정신이 돌아온다. “네가 정말 진석이구나. 살아있었구나.”

이후 다시 인민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며 동생의 탈출을 돕다 죽는 진태의 이야기는 50년 후에 발견한 유골과 만년필 이야기로 이어진다. 본래 진태가 동생 진석에게 선물했던 만년필을 간직하고 죽은 진태의 유골 앞에서 늙은 진석은 소리친다. 형이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구두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구두’는 권력의 상징도 되지만(구둣발로 짓밟다!)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입학과 입사 때 구두를 선물하듯이). 오랫동안 기억하겠다는 만년필(진태가 진석에게 주었던)과 영신이 진태에게 선물했고 영신이 죽을 때 진태가 총 맞은 영신의 상처를 싸매주었던 손수건의 ‘기억’ 이미지를 넘어서서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기억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이제 아픈 역사를 닫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새로운 출발의 이미지를 담은 구두는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형의 지극한 사랑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치 엄마의 태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듯한 이진태의 유골이 보여주는 이미지대로 새로 태어나는 화해의 ‘아기’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야 할 책임도 이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그 용서의 아기가 조금 자라는가 싶더니 발육부진으로 고생하고, 이제 다시 태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듯이 남과 북이 이념의 대립을 접고 살인과 광기의 시대를 마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형과 아우의 지극한 사랑과 같은 가족애로 우리의 민족적 화해와 용서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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